충국순의비
사적지 개요
충국순의비는 창의대장 이규풍 선생과 가족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규갑(1888~1970)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그는 동년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 선출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의 부인 이애라(李愛羅)는 어린애를 업고 동분서주하다가 아현동에서 일경에게 검문을 당하자 빼앗긴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몸을 뛰쳐 달아나서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동년 4월 10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으며, 4월 19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동년 7월에는 의정원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해에는 상해한인청년단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화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29년 7월 20일에는 신간회 동경지회 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규풍(1865~1932)은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의용군을 조직하여 회령과 경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후 노령으로 후퇴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3월에는 길림에서 열리는 민족혁신파 대표자대회에 노령지역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6년 4월에 길림성 영남호텔에서 정의부의 혁명원로인 양기탁(梁起鐸)을 위시하여 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지역의 대표인 최소수(崔素水)·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고려혁명당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길림성 소수분(小綏芬)에서 다시 노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이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민호(1895~1944)는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황해도 일부 및 전라·충청도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 지휘하고 본부로 돌아오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1922년 가족을 동반하고 노령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시 만주로 들어가 신민부 부원으로 활동하던 중, 아버지 이규풍(李奎豊)이 사망하자 북경으로 가서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장처명(張處明)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일제의 악독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이르게 되자 가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44년 5월 29일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애라(1894~1922)는 영명여학교 교감 이규갑(李奎甲)과 결혼 후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7년 평양의 정의여학교에 전근되어 근무하던 중,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가 평양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이 비밀히 연락 회합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소집하는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어린애를 업고 동부서주하였는데, 아현동(阿峴洞)에서 일 헌병에게 몸수색을 당하게 되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뛰쳐 달아나는 등 눈물겨운 일화를 남겼다. 이 아기는 애처롭게 사망하였는데 애국부인회에서 장사를 지내었다고 한다. 남편을 쫓아 만주 간도로 건너갔던 그는 국내에 연락차 도문(圖們)을 거쳐 입국하다가 함북 웅기(雄基)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규갑(1888~1970)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그는 동년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 선출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의 부인 이애라(李愛羅)는 어린애를 업고 동분서주하다가 아현동에서 일경에게 검문을 당하자 빼앗긴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몸을 뛰쳐 달아나서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동년 4월 10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으며, 4월 19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동년 7월에는 의정원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해에는 상해한인청년단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화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29년 7월 20일에는 신간회 동경지회 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규풍(1865~1932)은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의용군을 조직하여 회령과 경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후 노령으로 후퇴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3월에는 길림에서 열리는 민족혁신파 대표자대회에 노령지역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6년 4월에 길림성 영남호텔에서 정의부의 혁명원로인 양기탁(梁起鐸)을 위시하여 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지역의 대표인 최소수(崔素水)·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고려혁명당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길림성 소수분(小綏芬)에서 다시 노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이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민호(1895~1944)는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황해도 일부 및 전라·충청도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 지휘하고 본부로 돌아오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1922년 가족을 동반하고 노령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시 만주로 들어가 신민부 부원으로 활동하던 중, 아버지 이규풍(李奎豊)이 사망하자 북경으로 가서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장처명(張處明)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일제의 악독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이르게 되자 가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44년 5월 29일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애라(1894~1922)는 영명여학교 교감 이규갑(李奎甲)과 결혼 후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7년 평양의 정의여학교에 전근되어 근무하던 중,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가 평양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이 비밀히 연락 회합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소집하는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어린애를 업고 동부서주하였는데, 아현동(阿峴洞)에서 일 헌병에게 몸수색을 당하게 되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뛰쳐 달아나는 등 눈물겨운 일화를 남겼다. 이 아기는 애처롭게 사망하였는데 애국부인회에서 장사를 지내었다고 한다. 남편을 쫓아 만주 간도로 건너갔던 그는 국내에 연락차 도문(圖們)을 거쳐 입국하다가 함북 웅기(雄基)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탐방로그
오충비는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산 60-5에 위치한다. 충남 아산시 피나클랜드 옆 산 정상으로도 주소가 알려져 있으나, 산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해당 주소로 검색하면 된다. 산 속에 위치하므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여 산으로 올라오면 선생의 가족묘를 찾을 수 있으나, 길이 험하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인물정보
- 성명
- 이규갑
- 한자명
- 李奎甲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생몰년도
- 1888 ~ 1970
- 본적
- 충청남도 아산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1919년 3월 20일 국민대회(國民大會) 중앙대표(中央代表)로서 인천 만국공원(仁川萬國公園)에서 개최(開催)하려고 하였으나 실패(失敗)함. 2.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충청도의원(忠淸道議員)을 역임(歷任)(1919년 4월) 3. 1919년 7월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청원분과위원(請願分科委員)을 역임(歷任)하였음.
이규갑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규풍
- 한자명
- 李奎豊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1865 ~ 1932
- 본적
- 충청남도 아산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4 경성(京城)에서 개최된 국민대회(國民大會)에서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된 후 민족혁신파(民族革新派) 대표자대회(代表者大會) 노령대표(露領代表)와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위원(委員)으로 활동함.
이규풍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민호
- 한자명
- 李敏鎬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생몰년도
- 1910 ~ 1933
- 본적
- 함경남도 신흥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2010
공적개요
1928년 5월 함흥고보(咸興高普) 재학중 일본인 교사 배척 등의 주장을 하며 동맹 휴교(同盟休校)를 전개하던 중 동맹휴학 이탈자를 제재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7월(미결구류(未決拘留) 140일)을 받았으며, 1930년 6월 1일 함흥 가평 탄광(加平炭鑛)의 노동자 쟁의 중 탄광을 폭파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3년(미결구류(未決拘留) 210일)을 받고 복역 중 형집행정지(刑執行停止)로 출옥 후 옥고(獄苦)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
이민호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애라
- 한자명
- 李愛羅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1894 ~ 1922
- 본적
- 충청남도 아산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이규갑(李奎甲)의 처(妻)로서 부군(夫君)을 도와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열렬(熱烈)히 하다가 1919년 3월 말경(月末頃)에 연락차(連絡次) 만주(滿洲)로 감 2. 간도(間島)의 동포(同胞)들과 독립운동자(獨立運動者)를 찾아서 밀서(密書)를 가지고 도문강을 거처 국내(國內)로 드러오다가 헌병(憲兵)에게 피체(被逮)되어 참살 당(慘殺當)함
이애라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