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독립유공자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안내판·표지석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161

사적지 지도 안내

길찾기   |   로드뷰

사적지 개요

서산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운동에서 시작됐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이후 재봉기한 창의대장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봉기한 정주원 의병에 적지 않은 수의 서산 출신의병들이 참여했다. 이후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은 이철영, 김상정과 같이 직접 몸으로 항거하는 의협투쟁과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3.1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의열 투쟁에 나선 독립단 서산지단원 서병철, 조선민족대동단 소속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음암면 유계리 출신의 김용환, 의친왕을 수행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향했던 한기동 등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는 국외 독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전개됐다.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도 서산출신 학생들은 빠지지 않았다. 운산면 출신 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학생 시절 항일학생단체인 다혁당을 결성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지난 2021년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용역에서 542명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타지역과 비교에서 월등이 많은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다. 조사는 문헌조사와 일제강점기 당시의 형행기록조사, 관련 주민들의 구술채록을 통해 진행됐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병 9명, 계몽운동 278명, 3.1운동 112명, 국내항일 82명, 독립운동 지원 1명, 만주방면 2명, 문화운동 11명, 중국방면 1명, 청년운동 42명, 학생운동 3명, 기타 1명이다. 이를 보면 이름 없는,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서산 주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난지도에서 최구현 의병과 함께 일본수비대에 항전했던 김태순 의병, 광주학생운동 연합시위 참여를 권유하고 경성역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병묵 학생, 비밀결사단체 독서회, 적우회 등 적색일반사용인조합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선 17세의 민태규, 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1934년 신건설사건(제2차 카프검거사건) 주동자로 활동했던 윤붕원 등 일부는 총을 들고, 일부는 대한독립청년단 활동으로, 계몽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과 군자금 모집으로, 또 학생은 학생운동으로, 그리고 일반 주민들은 3.1만세시위로 참여했다.

탐방로그

독립유공자탑은 서산시 동문동 161 나라사랑공원에 위치한다. 나라사랑기념탑 근방에 독립유공자탑이 위치하며, 인근에는 6.25 전쟁 및 베트남전 참전 유공자탑이 건립되어 있다.

인물정보

성명
가재연
한자명
賈在衍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23 ~ 1945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44. 4월 인천상업학교 출신 명치대학생(明治大學生)인 송재필(宋在弼)의 학병반대 결의문(學兵反對決議文)이 적경(敵警)에게 탐지되어 송재필과 동급생들이 한국인학생 친목회를 결성한 것을 트집잡아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다고 함.

인물정보

성명
권병연
한자명
權炳淵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2 ~ 1919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 4. 4 강원도 양양군 양양(襄陽)장터에서 다수 군중(多數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며 시위(示威)를 하고 이어서 경찰서(警察署)를 엄습(掩襲)하고 구속자(拘束者)의 석방(釋放)을 요구(要求)하며 시위(示威)를 계속(繼續)하다가 무차별(無差別) 발포(發砲)한 일경(日警)의 총탄(銃彈)에 맞아 총살(銃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권주상
한자명
權周相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1 ~ 1957
본적
충청남도 아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4.4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 거사(擧事)를 위하여 대호지면장(大湖芝面長)인 이인정(李寅正)의 주동(主動)에 따라 다수(多數) 동지(同志)와 함께 군중(群衆) 1,000여명(餘名)의 시위 군중(示威群衆)과 천의(天宜)장터까지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고 경찰 주재소(警察駐在所)로 몰려가서 기물(器物)을 파괴(破壞)하는 등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권주상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관룡
한자명
金寬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75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2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해미면(海美面)에 소재(所在)한 해미공립보통학교(海美公立普通學校) 졸업생 송별회(卒業生送別會)가 끝난후(後)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동(主動)하여 수(數)10명(名)이 면사무소(面事務所)와 우시장(牛市場)으로 가서 대한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를 선창(先唱)하며 시위(示威)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관룡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금산
한자명
金錦山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35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에서 면장(面長) 이인정(李寅正)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천의(天宜)장터에 운집한 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금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봉욱
한자명
金鳳旭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46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4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에서 면장(面長) 이인정(李寅正)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천의(天宜)장터에 운집한 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봉욱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봉제
한자명
金鳳濟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0 ~ 1929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유림대표(儒林代表)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儒林)의 한 사람으로 서명(署名)한 사실이 확인됨.

김봉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상무
한자명
金商武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23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代表)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사실이 확인됨.

김상무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상정
한자명
金商玎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5 ~ 1954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월 일경(日警)의 회유책(懷柔策)으로 개최(開催)된 면민대회(面民大會)에서 민비 살해(閔妃殺害)의 참변(慘變)을 면민(面民)에게 환기(喚起)시키고 왜왕(倭王)의 명령(命令)은 맹서(盟誓)코 복종(服從)할 수 없다하고 좌수지(左手指)를 잘라 혈서(血書)를 작성하여 총독(總督)에게 발송하였으며 그 후 납세(納稅) 및 삭발령(削髮令)을 반대하여 3회에 걸쳐 혈서(血書)를 쓰고 항일 정신(抗日精神)을 발휘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성연
한자명
金聖連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64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4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에서 면장(面長) 이인정(李寅正)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천의(天宜)장터에 운집한 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성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수성
한자명
金壽成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미상 ~ 1919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0

공적개요

1919. 3. 7. 평북(平北) 철산군(鐵山郡)에서 안태영(安泰英) 등이 주도하는 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김수성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쌍봉
한자명
金雙奉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9 ~ 1908
본적
충청남도 기타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08.5월 국권(國權)을 회복(恢復)하고자 의진(義陣)을 일으키고 신갑순(申甲順) 이용백(李用白) 등 부하(部下) 30여명(餘名)과 함께 충남(忠南) 해미군(海美郡)과 당진군(唐津郡) 등지(地)에서 군자금(軍資金)을 모집(募集)하며 일밀정(日密偵)을 난타(亂打)하고「연못」에 던져 질식(窒息)케 하여 살해(殺害)하고 피체(被逮)되어 교수(絞首)를 받아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김쌍봉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남정
한자명
南正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80 ~ 1950
본적
충청남도 당진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23. 10월 만주(滿洲) 요녕성(遼寧省)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加子)에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장춘(長春)의 일 영사관(日領事館)과 신양(瀋陽)의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하는 등 적기관파괴 주구배(走狗輩) 처단활동을 폈으며 1926. 4월(음) 만주 길림성에서 조선혁명군 대본영을 조직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신청사(新廳舍)와 경성부청(京城府廳) 조선은행(朝鮮銀行) 등 일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5년 6월여 간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남정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맹달섭
한자명
孟達爕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1 ~ 1910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0

공적개요

1906. 5월 충남(忠南) 홍산(鴻山)에서 거의한 민종식 의진(閔宗植義陣)의 홍주성전투(洪州城戰鬪)에 참가하였고 충남 정산(定山), 부여(扶餘) 및 경기도 죽산(竹山), 양성(陽城) 등지에서 여러차례 일본군과 교전(交戰)하였고 부여군아(扶餘郡衙)를 습격하여 죄수를 방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홍주 의진(洪州義陣)의 해진(解陣) 후에도 1910년까지 충남 서산군(瑞山郡), 공주군(公州郡)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교형(絞刑)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맹달섭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문만동
한자명
文萬同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1 ~ 1958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에서 800 여명(餘名)의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萬歲示威運動)에 참가(參加)하여 동 면사무소(面事務所) 및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문만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성옥
한자명
朴聖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69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에서 800 여명(餘名)의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萬歲示威運動)에 참가(參加)하여 동 면사무소(面事務所) 및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성옥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서병철
한자명
徐丙哲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2 ~ 1970
본적
경상북도 달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 임정원(臨政員) 허영원(許永元)의 권유로 군자금 모금에 가담 영남지방(嶺南地方)의 부호자를 대상으로 활동중 일경에 체포되어 2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서정천
한자명
徐廷天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17 ~ 1966
본적
전라북도 김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3. 5. 15 광복군(光復軍) 제1지대 제1구대(區隊)에 입대하여 1945. 8. 15까지 전방에서 공작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재만
한자명
宋在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51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탈취하는 등 활동하다가 3년 10월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안학순
한자명
安鶴淳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3 ~ 1950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39년 인천공립상업학교(仁川公立商業學校) 졸업생을 중심으로 오륜조(五輪組)를 조직하여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 반대운동(反對運動) 등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였으며 1943년 7월경 일본(日本) 명치대학(明治大學)에 재학 중 일제의 강제 학병모집에 항거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인천상고(仁川商高) 졸업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동월 충북 영동경찰서에 체포되어 1944년 6월에 대전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가 1945년 3월 병보석으로 석방된 사실이 확인됨.

안학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동렬
한자명
柳東烈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74
본적
전라북도 장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3.19 전북(全北) 장수군(長水郡) 산서면(山西面) 동화(桐花)장터에서 박정주 등(朴政柱等)과 같이 주민(住民)을 규합(糾合),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유동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인기
한자명
兪仁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57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에서 800 여명(餘名)의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萬歲示威運動)에 참가(參加)하여 동 면사무소(面事務所) 및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유인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흥수
한자명
柳興洙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21 ~ 2016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 재학(在學), 졸업후(卒業後)에 선(亘)하여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여 독립 후 민족문화형성의 주동자(主動者)가 되기 위하여 활약하고 졸업 후엔 교사직(敎師職)을 통하여 동지를 규합코 학생, 학부형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문화를 통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타가 피체되어 치유법(治維法)을 적용 다음과 여(如)히 처형(處刑)됨 1941년 8월 일 사건 발생(事件發生) 1942년 1월 일 예심회부(豫審回付) 1943년 2월 8일 예심종결(豫審終結), 공판회부(公判回付) 1944년 2월 일 징역5년 언도(言渡) 1945년 8월 15일 복역(服役) 중(中) 해방(解放), 출옥(出獄)

인물정보

성명
이계성
한자명
李啓性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64
본적
충청남도 홍성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4월 1-2일경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홍성시장(洪城市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일경(日警)에게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규순
한자명
李奎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67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9

공적개요

1919.4.4 충남(忠南) 당진군(唐津郡) 대호지면(大湖芝面) 면사무소 앞에서 주민1,0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행진하다가 일경(日警)에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규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기웅
한자명
李起雄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9 ~ 미상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8

공적개요

1943. 7~8월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서산읍(瑞山邑)에서 정재학(鄭在學) 등과 잡담(雜談) 중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서 “미(美).영국(英國)이 승리할 것이며 미국(美國)이 승리하면 조선(朝鮮)도 독립(獨立)이 되고 기독교신자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일본의 군마(軍馬)사육장에서 인도인(印度人)이 군마(軍馬)를 죽였다”는 등의 시국담(時局談)을 유포하였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기웅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대하
한자명
李大夏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50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도리리(桃李里)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하다 피체(被逮)되어 주동자로서 징역 4년형을 받았으나 주민들의 구출운동으로 징역 8월로 1년 4개월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덕산
한자명
李德山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19 ~ 2002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0. 청년전지공작대(靑年戰地工作隊)에서 공작대(工作隊) 초모 공작(招募工作)과 왜군 동향정보(倭軍動向情報)수집 활동(活動) 1944 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政訓組) 문화주임 1945 한미합작(韓美合作) 특수 훈련(特殊訓練) O.S.S.을 마치고 활동(活動) 함.

이덕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봉하
한자명
李奉夏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69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19년 4월 8일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운산면(雲山面) 용현리(龍賢里) 보현산(普賢山) 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서국
한자명
李瑞國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1 ~ 2002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40년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성연면(聖淵面) 성연국민학교(聖淵國民學校)에 근무하는 일인 교장(日人校長) 및 일인 교사(日人敎師) 3명의 한국인(韓國人)에 대한 불미한 행동에 분개하여 교장실(校長室)에서 이들의 악행을 지적하고 일본으로 출국(出國)할 것을 주장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었다. 2. 훈계 방면(訓戒放免)된 후 도일(渡日)하였다가 사상(思想)이 불온(不穩)하다 하여 부산(釜山)으로 압송(押送)되어 만 87일간 구류 끝에 석방됨. 3. 1941년 당진군(唐津郡) 대호면(大湖面)의 주석(酒席)에서 동석(同席) 청년에게 항일 독립사상(抗日獨立事象)을 고취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6월 형(刑)에 3년 집행유예(執行猶豫)를 받았음. 4. 그 후 출옥하여 북해도(北海道) 탄광(炭鑛)으로 갔음. 그곳에서 감독(監督)과 다툰 끝에 사상불온자(思想不穩者)라 하여 최악 조건(最惡條件) 속에서 노동하다가 낙반사고로 중상을 입음. 5. 1943년 동경(東京)으로 와서 일본청년당에 가입하여 수상(首相) 소기(小磯) 암살(暗殺)의 기회를 노림. 6. 1945년 2월 비곡공원(比谷公園)안의 대정익찬회 본부(大政翼贊會本部)에서 모종(某種) 긴급회의(緊急會議)를 개최시 소기(小磯)가 참석할 예정임을 탐지하고 방청석에서 대기함, 그러나 소기(小磯)가 불참(不參)함을 보고 국무대신(國務大臣)이며 대정익찬회 부총재(大政翼贊會副總裁), 익찬장년단단장(翼贊壯年團團長)인 서방(緖方)을 대신(代身) 암살(暗殺)키로 하고 단상에서 단도를 저격 하다가 실신(失神)하여 체포됨. 중야형무소(中野刑務所)에 수형중 해방을 맞이하였음.

이서국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성하
한자명
李成夏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1954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3-4월경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의 시장과 주재소앞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주재소를 습격·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가 서산경찰서(瑞山警察署)에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세원
한자명
李世遠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08 ~ 1967
본적
충청남도 예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1학년 재학중이던 1930. 1. 15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동조하여 동교생(同校生) 정윤희(鄭允熙), 박재열(朴在烈) 등과 협의하여 1월 16일 오전 9시 30분 경부터 ‘학원의 독립’ ‘만세 피압박 민족’의 문구가 적혀 있는 깃발을 앞세우고 학생들을 이끌고 익선동(益善洞)을 지나 창덕궁(昌德宮)을 거쳐 봉익동(鳳翼洞)에 이르기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이세원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원범
한자명
李元範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6 ~ 1907
본적
전라남도 함평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14

공적개요

1907년 11월 전북(全北) 고창군(高敞郡)에서 기삼연 의진(奇參衍義陣)등에 속하여 부친(父親) 이남규(李南奎)와 함께 일본상점과 일군(日軍) 분파소(分派所)를 공격하다 일본군(日本軍)에 체포되어 동년(同年) 12월 피살(被殺), 순국(殉國)함.

이원범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원생
한자명
李源生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3 ~ 1947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1운동을 계기로 상해 임정(上海臨政)에서 충남대표(忠南代表)로 활동하면서 군자금조달을 위하여 1923년까지 활약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화영
한자명
李華榮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9 ~ 1908
본적
충청남도 기타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07년 음(陰) 8월부터 강원도(水原道) 횡성(橫城)과 홍천(洪川)에서 한상열 의진(韓相烈義陣)에 소속되어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08년 3월말 체포되어 류(流) 10년을 받고 공주감옥(公州監獄)에서 병사(病死)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헌태
한자명
鄭憲台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2 ~ 1940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동년 음력(陰曆) 11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간도전위대(間島前衛隊) 소속 모연대장 이제안(李濟安)의 지휘아래 북간도(北間島) 지방에서 독립운동 자금(獨立運動資金) 및 동지 규합을 위해 활동하던 중 체포(逮捕)되었으나 자수하여 기소유예(起訴猶豫)되었으며 1926년 6월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조선유학생연합웅변회(朝鮮留學生聯合雄辯會)에 참여하여 한국인의 해방을 절규하였고 1927년 5월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의 간사(幹事), 동년 12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京城支會)의 조직부(組織部) 상무간사(常務幹事) 등에 선임되어 각 지회(支會) 주최의 강연회에 연사(演士)로 참가하여 민지계발(民智啓發)에 힘쓰고 동년 이준열(李駿烈)등과 함께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을 조직하고 1929년 김철수(金綴洙)의 지시를 받고 입국한 안상훈(安相勳)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준비위원회(再建準備委員會) 조직을 위한 열성자대회(熱誠者大會) 개최를 계획하는 등 활동하다가 1929년 6월 체포(逮捕)되어 징역 7년을 받고 1932년 7월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로 이감(移監)도중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세’ ‘조선민족(朝鮮民族) 독립만세’ 등을 절규하다가 다시 징역 8월을 가형(加刑)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종원
한자명
趙宗元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2 ~ 1968
본적
충청남도 홍성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4월 1-2일경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홍성시장(洪城市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일경(日警)에게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한준
한자명
韓準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4 ~ 1950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41. 4. 23 충남 서산군 부석면 소재 공립심상소학교(公立尋常小學校)에 교사로 재직중 학생들에게 신문·잡지 등에서 수집된 일본왕(日本王), 궁성(宮城) 등의 사진을 넣어 두는 소위 봉호대(奉護袋)의 무용(無用)함을 지적하고 일본왕(日本王) 및 궁성(宮城)을 비난하였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한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허후득
한자명
許後得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46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3

공적개요

1919. 4. 8.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운산면(雲山面) 보현산(普賢山) 상(上)에서 50여 명의 리민(里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호억준
한자명
扈億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5 ~ 1941
본적
충청남도 서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4. 4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에서 800 여명(餘名)의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萬歲示威運動)에 참가(參加)하여 동 면사무소(面事務所) 및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호억준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