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익산4.4만세운동 순국열사비

유형
비석 |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조형물 | 안내판·표지석
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74-14
관련사건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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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익산4.4만세운동 순국열사비는 익산 4.4만세운동에 참여한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김치옥, 박성엽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익산 4.4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4월 4일 남부시장에서 오산면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와 도남학교 문용기 열사가 주도한 가운데 1천 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일본에 항거한 날이다.
 
문용기(1878 - 1919)의 호는 관제이며,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1년 군산의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하였고, 1907년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왓킨스학교에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1년 왓킨스학교를 마치고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익산군 오산면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용기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서정만(徐廷萬)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만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무렵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모였고, 일행은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장에 나와 있던 군중들이 합세하여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행렬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의 만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의 농장 일본인 농장원 등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문용기는 당시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연설하고 있는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달려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영문(1904 - 1919)은 1919년 4월 4일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그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 집사로 활동하고 있던 김치옥(金致玉)은 군산(群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른 교인들에게 “독립달성이라는 공통된 목적 아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김치옥(金致玉) 등 300여 명은 이리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학생이었던 박영문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는 전날 동생인 박동근에게 “내일 이리 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니 함께 가면 어떻겠는가?”라며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박영문 등 시위군중은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독립을 요구했다.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가 대교농장(大橋農場) 앞에 이르자 소방조까지 동원해가며 시위 진압에 나섰다. 헌병들은 발포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박도현(朴道玄) 등 4명이 순국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16세 학생이었던 박영문도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순국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경춘(1877 - 1919)은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문용기(文鏞祺)·박도현(朴道賢)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26일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래, 일본의 보병 제 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여 삼엄한 경비를 펼쳐왔다. 그러나 오산면(五山面)의 문용기·박도현 등의 기독교 간부들과 수차에 걸쳐 숙의를 한 끝에, 이리 장날인 4월 4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4일 정오,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이리 장터에 모이자, 그는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대 보병부대가 출동하여 시위군중을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만세시위의 대열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만세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일제는 수백명의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까지 동원하여, 총·창검·곤봉·갈구리등을 마구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다가,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벌이던 그는, 일제의 야만적인 발포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탐방로그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74-14 남전교회 옆 나라사랑동산 익산4.4 만세운동 순국열사비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교회 앞에 별도의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그곳에서 익산4.4만세운동 순국열사비를 찾을 수 있었다.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