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74-14
- 탐방로그
-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74-14 남전교회 옆 나라사랑동산 익산4.4 만세운동 순국열사비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교회 앞에 별도의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그곳에서 익산4.4만세운동 순국열사비를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나라사랑 동산
익산 4.4 만세운동 순국열사비
박영문(朴泳文) 열사 / 문용기(文鏞棋) 열사 / 장경춘(張京春) 열사
죽으면 죽으리이다 - 에스터 4장 16절
박영문(朴泳文) 열사 / 문용기(文鏞棋) 열사 / 장경춘(張京春) 열사
죽으면 죽으리이다 - 에스터 4장 16절
▶ 박영문(朴泳文) 열사
1919년 4월 4일 아침, 남전교회 박응춘 장로의 천금같은 아들 박영문 열사는 제2지대를 인솔하고 솜리장터에 도착하였다. 6개월 전에 결혼한 박영임 새댁은 옷고름을 입에 문 채 말 한마디 못하고 어린 낭군을 전필하며 하염없는 눈물만 흘려야 했다. 도남학교 스승인 문용기 열사의 지도로 반장인 박영문 열사는 학생들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다녔다. 박영문 열사는 상점문을 연 상인들에게는 애타는 소리로 문을 닫고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사정하였다. 12시 30분! 맨 앞에서 문용기 열사와 함께 박영문 열사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대모를 선도하였다. 대교농장 앞 사거리에서 일본 헌병은 잔인하게 그의 복부를 총검으로 찔렀다. 쓰러진 박영문 열사는 장을 움켜쥔 채 다시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세 번 외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니 그의 나이 꽃다운 15세이었다. "부자비한 일본 헌병의 칼날에 님은 가셨지만 대한독립을 염원하신 큰 뜻 청사에 빛나리라."
1919년 4월 4일 아침, 남전교회 박응춘 장로의 천금같은 아들 박영문 열사는 제2지대를 인솔하고 솜리장터에 도착하였다. 6개월 전에 결혼한 박영임 새댁은 옷고름을 입에 문 채 말 한마디 못하고 어린 낭군을 전필하며 하염없는 눈물만 흘려야 했다. 도남학교 스승인 문용기 열사의 지도로 반장인 박영문 열사는 학생들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다녔다. 박영문 열사는 상점문을 연 상인들에게는 애타는 소리로 문을 닫고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사정하였다. 12시 30분! 맨 앞에서 문용기 열사와 함께 박영문 열사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대모를 선도하였다. 대교농장 앞 사거리에서 일본 헌병은 잔인하게 그의 복부를 총검으로 찔렀다. 쓰러진 박영문 열사는 장을 움켜쥔 채 다시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세 번 외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니 그의 나이 꽃다운 15세이었다. "부자비한 일본 헌병의 칼날에 님은 가셨지만 대한독립을 염원하신 큰 뜻 청사에 빛나리라."
▶ 문용기(文鏞棋) 열사
1919년 4월 4일 뭉용기 열사는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학생들을 인솔하고 솜리장터에 도착하였다. 12시 30분, 300명의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문용기 열사는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사자후를 토한 뒤 맨 앞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만세를 부르는 문용기 열사에게 발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든그의 오른손을 칼로 내리쳤다. 문용기 열사는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왼손으로 집어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매 일본 헌병은 다시 그의 왼손마저 칼로 내리쳤다. 두 팔이 잘린 문용기 열사가 맨몸으로 피를 흘리며 계속 행진하자 일본 헌병은 무자비하게 문용기 열사의 몸을 난자하였다. 문용기 열사는 숨을 거두면서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국민이 되게 하겠소"라는 말을 남기며 장렬히 순국하셨다. 아아, 거룩한 문용기 열사의 품으신 뜻, 후대 민족의 찬란한 빛이시라!'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 열사에게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19년 4월 4일 뭉용기 열사는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학생들을 인솔하고 솜리장터에 도착하였다. 12시 30분, 300명의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문용기 열사는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사자후를 토한 뒤 맨 앞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만세를 부르는 문용기 열사에게 발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든그의 오른손을 칼로 내리쳤다. 문용기 열사는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왼손으로 집어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매 일본 헌병은 다시 그의 왼손마저 칼로 내리쳤다. 두 팔이 잘린 문용기 열사가 맨몸으로 피를 흘리며 계속 행진하자 일본 헌병은 무자비하게 문용기 열사의 몸을 난자하였다. 문용기 열사는 숨을 거두면서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국민이 되게 하겠소"라는 말을 남기며 장렬히 순국하셨다. 아아, 거룩한 문용기 열사의 품으신 뜻, 후대 민족의 찬란한 빛이시라!'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 열사에게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장경춘(張京春) 열사
외지에서 남전리로 이사하여 남전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일하면서 도남학교를 다녔던 장경춘 열사 남전교회 김치옥, 박성엽, 문용기와 함께 대한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교회 사찰 집, 박다연 집사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던 장경춘 열사는 1919년 4월 4일 교인들과 함께 솜리 남부시장에 이르렀다. 거사 시간인 12시 30분, 장경춘 열사는 문용기 박영문 열사와 함께 만세를 부르는 대오의 앞장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야만적인 발포로 순국하셨다. 이름도 빛도 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 부르다 끝내 산화하신 님의 절개는 끊임없는 강물이 되어 영원히 흐르리! 1991년 정부는 장경춘 열사에게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외지에서 남전리로 이사하여 남전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일하면서 도남학교를 다녔던 장경춘 열사 남전교회 김치옥, 박성엽, 문용기와 함께 대한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교회 사찰 집, 박다연 집사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던 장경춘 열사는 1919년 4월 4일 교인들과 함께 솜리 남부시장에 이르렀다. 거사 시간인 12시 30분, 장경춘 열사는 문용기 박영문 열사와 함께 만세를 부르는 대오의 앞장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야만적인 발포로 순국하셨다. 이름도 빛도 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 부르다 끝내 산화하신 님의 절개는 끊임없는 강물이 되어 영원히 흐르리! 1991년 정부는 장경춘 열사에게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치옥(金致玉) 열사 / 박성엽(朴成燁) 장로
익산 4.4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주후 2019년 4월 4일
익산 4.4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주후 2019년 4월 4일
▶ 김치옥(金致玉) 열사
1919년 4월 4일 솜리만세운동은 김치옥 열사가 설계하였다. 남전교회의 중심 집사인 김치옥 열사는 박성열 집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작정하고 문용기 열사를 찾아가 구국의 길을 함께 걷기로 맹약하엿다. 남전교회 교인들을 3지대로 나누고 제1지대는 최원봉 집사(목사)가, 제2지대는 박영문 열사가, 제3지대는 문용기 열사가 인솔하여 솜리로 진출하였다. 약속된 시간 12시 30분, 박성엽의 사회로 단상에 오른 김치옥 열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문용기 열사가 단 위에 올라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설파하였다. 익산 4.4만세운동의 주동자 김치옥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고난의 옥살이를 한 끝에 남전교회로 돌아왓다. 그러나 김치옥 열사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일생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북한 땅에서 소천하였다. 1990년 정부는 그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19년 4월 4일 솜리만세운동은 김치옥 열사가 설계하였다. 남전교회의 중심 집사인 김치옥 열사는 박성열 집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작정하고 문용기 열사를 찾아가 구국의 길을 함께 걷기로 맹약하엿다. 남전교회 교인들을 3지대로 나누고 제1지대는 최원봉 집사(목사)가, 제2지대는 박영문 열사가, 제3지대는 문용기 열사가 인솔하여 솜리로 진출하였다. 약속된 시간 12시 30분, 박성엽의 사회로 단상에 오른 김치옥 열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문용기 열사가 단 위에 올라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설파하였다. 익산 4.4만세운동의 주동자 김치옥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고난의 옥살이를 한 끝에 남전교회로 돌아왓다. 그러나 김치옥 열사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일생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북한 땅에서 소천하였다. 1990년 정부는 그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박성엽(朴成燁) 장로
박성엽 집사는 1919년 익산 4.4 만세운동의 주동자이다. 그의 어머니와 함께 남전교회 초창기의 지도적인 집사이었다. 미국 남장로회 군산선교부의 직원이었던 박성엽 집사가 군산 3.5만세운동 때 사용한 독립선언서를 감춰두었다가 김치옥 열사에게 수교하고 문용기 열사와 함께 익산 4.4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4월 4일 12시 30분, 단상에 오른 박성엽 집사의 사회로 만세운동이 시작하였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도중 일번 헌병이 쏜 총탄이 박성엽 집사의 백고모자를 뚫고 지나갔다. 박성엽 집사는 급히 피신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몰래 귀국하여 김제지방으로 다니며 장로가 되어 교회할동에 전념하였다.
박성엽 집사는 1919년 익산 4.4 만세운동의 주동자이다. 그의 어머니와 함께 남전교회 초창기의 지도적인 집사이었다. 미국 남장로회 군산선교부의 직원이었던 박성엽 집사가 군산 3.5만세운동 때 사용한 독립선언서를 감춰두었다가 김치옥 열사에게 수교하고 문용기 열사와 함께 익산 4.4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4월 4일 12시 30분, 단상에 오른 박성엽 집사의 사회로 만세운동이 시작하였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도중 일번 헌병이 쏜 총탄이 박성엽 집사의 백고모자를 뚫고 지나갔다. 박성엽 집사는 급히 피신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몰래 귀국하여 김제지방으로 다니며 장로가 되어 교회할동에 전념하였다.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74-14 남전교회 옆 나라사랑동산 익산4.4 만세운동 순국열사비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교회앞에 별도의 공원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