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계명당고개 대한독립만세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비석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산30-7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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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식수기념일 행사 후 덕과면 일대에서 8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로  신경화(申京化, 1872~1940), 신봉순(申鳳淳, 1887~1959), 이범수(李範壽, 1893~1945), 이석기(李奭器, 1880~1938), 이석화(李石和, 1868~1931),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승순(李承珣, 1868~1936), 이용기(李龍器, 1897~1933), 이풍기(李豊基, 1881~1932), 조동선(趙東先, 1871~1930), 이준기(李俊器), 김선양(金善養), 이재화(李裁和)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사매면발전협의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9년 11월 17일 이 탑을 세웠다.

탐방로그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산 35-2 3.1공원 계명당고개 대한독립만세탑과 대한군경 순국열사 충령비를 찾아 왔는데 없었다. 그래서 주변 주민분께 여쭤보니, 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고 알려주셨다. 주민께서 알려주신 곳으로 이동하여 온 곳의 GPS상 주소는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산 30-7이다.

인물정보

성명
강경진
한자명
姜景鎭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3 ~ 1940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7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자금 200원을 납부하고 계속 군자금모집에 활동하다 일경에게 피체되어 1920. 4. 15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해근
한자명
金海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0 ~ 1946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4 남원 독립만세 시위(南原獨立萬歲示威)에 참가하여 군중을 선동(煽動), 왜병청(倭兵廳)을 습격(襲擊)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어 1919. 5. 9 광주지법 남원지청(光州地法南原支廳)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행즙
한자명
金幸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54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23 전북(全北)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장날 수천 명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경찰 주재소(警察駐在所), 면소(面所), 일인 가옥(日人家屋) 등에 투석(投石)하는 등 군중을 지휘하여 격렬한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문경록
한자명
文璟錄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4 ~ 1919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19. 3. 2 같은 천도교도(天道敎徒)로서 전북(全北) 남원군(南原郡) 덕과면(德果面) 사율리(沙栗里)에 거주하는 황동주(黃東周)가 동도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의 천도교 전도사 이기동(李起東)으로부터 손병희 외(孫秉熙外) 33인이 연명(連名)한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 2통을 영수(領受)하고 와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요소요소에 첩부할 뜻을 교사하자 즉시 밤을 타 사매면(巳梅面) 계수리(桂壽里) 장귀연(張貴然)과 동면 인화리(仁化里) 박봉석 가(朴鳳錫家)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첩부하며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 후 옥중여독으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유창근
한자명
柳昌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4 ~ 1938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4 남원 독립만세 시위(南原獨立萬歲示威)에 참가(參加)하여 활동(活動)하다가 체포(逮捕)되어 1919. 5. 9 남원지청(南原支廳)에서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대수
한자명
李大壽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1 ~ 1952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8

공적개요

1928년 전북(全北) 남원군(南原郡) 사매면(巳梅面)에서 이현수(李鉉壽)로부터 신사회 건설 이론을 지도받고, 1930년 7월 동창친목회(同窓親睦會)를 조직하여 서무부(庶務部) 집행위원(執行委員)으로 활동함. 1931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리(同里)에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설립 후 농민 자녀들에게 학습 및 신사회 건설 이론을 교육하였고, 1932년 9월 『단결하자』라는 제목의 연극을 준비하다 체포되어 무죄(無罪)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명수
한자명
李明洙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8 ~ 미상
본적
전라북도 전주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5

공적개요

1919년 3월 13일 전북(全北) 전주군(全州郡) 전주교(全州橋) 부근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범수
한자명
李範壽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3 ~ 1945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남원(南原) 지구 3.1 운동거사를 사전에 계획하고 운동에 참가한 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전북(全北) 일단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헌납하는 등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석기
한자명
李奭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31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 3. 31 전북 남원군 덕리면장직(德理面長職)에 재직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고 각 면장(面長)의 사표를 미리 받아 신분을 정리한 후 식수행사시 배부할「독립만세취지서(獨立萬歲趣旨書)」와 격문 등을 작성하며 각 면장에게 배부하고 당일 모인 800여 명에게 식수를 마치게 한 다음 독립만세를 고창 연창하면서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석기
한자명
李奭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31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 3. 31 전북 남원군 덕리면장직(德理面長職)에 재직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고 각 면장(面長)의 사표를 미리 받아 신분을 정리한 후 식수행사시 배부할「독립만세취지서(獨立萬歲趣旨書)」와 격문 등을 작성하며 각 면장에게 배부하고 당일 모인 800여 명에게 식수를 마치게 한 다음 독립만세를 고창 연창하면서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용기
한자명
李龍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33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3.1 운동에 참여하여 거사를 주동적으로 모의하고 독립만세시위를 하여 왜헌병과 충돌 2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형기
한자명
李형器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미상 ~ 1908
본적
함경남도 갑산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7

공적개요

연월일 미상 하와이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귀국하여 러시아와 중국(中國) 국경지역의 여러 곳에 민립학교(民立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08년 최재형(崔在亨)의 동의회(同義會)와 이범윤(李範允)의 창의회(彰義會) 소속 의병(義兵)들이 주축을 이룬 연해주 의진(沿海州義陣)에 합류, 국내진공전을 전개하여 함북(咸北) 경원(慶原)·경흥(慶興) 등지에서 승전한 후 회령(會寧) 영산전투(靈山戰鬪)에서 패전하자 독자적으로 회령(會寧)의 일본군 부대를 방화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피체되어 일군(日軍)의 회유를 꾸짖고 의연하게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한익
한자명
丁漢翼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77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3.1운동 당시 남원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여 동읍(同邑) 헌병대를 습격하다가 총탄에 맞어 중상을 당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한태현
한자명
韓泰鉉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8 ~ 1951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음(陰) 8월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団)에 가입(加入)하는 한편 전북 남원지방(全北南原地方)에서 청년단(靑年團)을 200원(圓)을 헌납(獻納)하며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형갑수
한자명
邢甲洙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2 ~ 1973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4.4. 남원(南原)장날 군중(群衆)을 선도(先導)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万歲示威)를 하였으며, 동년(同年) 8월 대동단(大同団)에 가입(加入)하여 전북지단(全北支団) 총무부장(総務部長)을 맡아 군자금(軍資金) 200원(円)을 납부(納付)하는 등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1921. 3 징역 1년형(年刑)에 처(処)하기 까지 2년간(年間)의 독립운동 기간(獨立運動期間)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형광욱
한자명
邢光旭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8 ~ 1977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21

공적개요

1926년 전북 남원에서 용북청년회 집행위원, 1928년 신간회 남원지회 간사 및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1931년 가을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소작료 감하운동과 동지 규합 등에 노력하다가 1933년 8월경 체포되어 무죄 처분을 받음.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