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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3.1독립운동기념비

유형
비석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523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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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이 기념비는 강화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11월 26일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강화의 3·1운동은 3월 13일 강화읍 장날을 기하여 전개되었는데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주동자 5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3월 18일 강화읍 장날에 길상면 온수리에 거주하는 유봉진(1990, 애족장)의 주도하에 2만 여명의 군중이 장터에 몰래 집결하였다가 12시를 알리는 강화 동종의 개시 신호로 일시에 뛰어나와 민족주권을 되찾고자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후 5월 1일까지 2달 동안 각 면 단위에서 횃불 시위 등으로 진행된 강화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60여 명, 체포 및 재판 회부가 50여 명에 이르며 3·1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이 18명에 이른다.

탐방로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523 용흥궁공원 주차장에 강화 3.1독립운동기념비(강화3.1독립만세기념비)를 찾아왔다.

인물정보

성명
김교창
한자명
金敎昌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1959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3.1 운동 당시 수원(水原) 송산(松山) 독립만세시위운동 시 주모자의 한사람으로 가단하여 일본경찰 1명을 타살케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징역 7년을 복역한 사실이 확인됨.

김교창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덕순
한자명
金德順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909 ~ 1945
본적
평안북도 선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16

공적개요

1940년 3월말(月末)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비밀결사 죽마설(竹馬楔)에 가입하여, 이후 서울에서 동지들과 회합하여 1941년 4월 운동자금 모집을 위한 사업부(事業部)를 조직, 그 부원(部員)으로 활동하다 1941년 8월 9일 체포되어 1943년 3월 동경지방재판소(東京地方裁判所)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해방(解放) 이전(以前) 옥중 순국(獄中殉國)함.

김덕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유의
한자명
金有義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9 ~ 1947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가 주동한 독립만세시위 운동에 참가하여 강화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토록 하고 경찰에게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여 고창(高唱) 시위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형주
한자명
金亨注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6 ~ 미상
본적
전라남도 순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09. 3월-5월 양경학(楊京鶴)·김응천(金應千) 등과 함께 전북(全北) 순창(淳昌), 태인(泰仁)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같은해 5월 25일 경(頃) 순창군(淳昌郡) 구암면(龜岩面) 에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한경서(韓京西)를 처단(處斷)하는 등의 활동(活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종신 징역(終身懲役)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길양
한자명
朴吉陽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6 ~ 1928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1년 이후 경기(京畿) 삼남지방(三南地方)을 순회하면서 군자금을 다수 모집(多數募集)하다 징역 1년 6월 형을 복역하였으며 그 후 사회주의 계열(社會主義系列)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재감중(在監中)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찬규
한자명
朴贊圭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28 ~ 2019
본적
충청북도 청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0

공적개요

1945. 2월 중국(中國) 북경(北京) 주둔 일본군(日本軍) 제1972부대의 군속(軍屬)으로 근무하던 중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소속으로 북경에서의 지하공작을 위해 일본군 군속으로 위장(僞裝)하여 활동하던 김순근(金順根)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부대 관사(官舍)에 잠입하여 지하공작에 필요한 권총 등을 확보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단기(短期) 5년 장기(長期) 7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찬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신의철
한자명
申義澈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24 ~ 2003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4. 11월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신의철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염성오
한자명
廉成五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7 ~ 1947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9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독립만세시위거사에 찬동하여 동지 규합과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에 힘쓰고 동월(同月) 18일 읍내 장터에 모인 만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시위를 하다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년2월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염성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오용진
한자명
吳龍辰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5 ~ 1979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 8. 24 강화군(江華郡) 양사면(兩寺面) 자가(自家)에서 임두엽(林斗曄), 황준실(黃俊實) 등과 같이 다수 군중(多數群衆)을 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계획(計劃)하고 대형 태극기(大形太極旗)와 군민(群民)의 단합(團合)을 호소(呼訴)하는 격문(檄文)을 만들어 게시(揭示)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도(主導)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오용진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경근
한자명
劉景根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7 ~ 1956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월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에서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선도(先導)하고 서울로 피신(避身), 대동단 조직(大同團組織)에 가담(加擔)하여 노령(露領) 이동휘(李東輝)로부터 군대 양성(軍隊養成)을 위하여 국내(國內)에서 지원자(志願者)를 모집(募集)하라는 밀령(密令)를 받고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유봉진
한자명
劉鳳鎭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56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5 강화읍(江華邑) 경찰서(警察署) 앞에서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여 지역 책임자(地域責任者)가 되어 군수(郡守) 등 관헌(官憲)들을 강압(强壓)으로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함께 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 형을 언도받고 주모자(主謀者)로서의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유학서
한자명
劉學瑞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70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읍내(邑內)장터에서 10,0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경찰서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행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유학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희철
한자명
劉熙哲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42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8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으 3.1운동계획에 참가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시위군중에게 배부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년여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윤윤용
한자명
尹允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47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 서울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 1년생(年生)으로 재학시(在學時) 파고다 공원에서 손병희(孫秉熙)등 33인(人)의 민족대표(民族代表)가 발표(發表)한 조선독립선언(朝鮮獨立宣言)의 취지에 찬동하여 수천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조선독립’(朝鮮獨立)을 선언(宣言)하고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행진 하다가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 3년간(年間) 집행유예(執行猶豫)를 받았으나 8월간(月間)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윤윤용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능권
한자명
李能權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64 ~ 1909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80

공적개요

1908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을 포섭하여 강화도(江華島)에서 일군과 수차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다가 피체되어 교수형을 받아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봉석
한자명
李奉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3 ~ 1953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가 주동한 독립만세시위 운동에 참가하여 강화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여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토록 하고 경찰에게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고 고창(高唱) 시위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봉석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사국
한자명
李思國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61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가 주동한 독립만세시위 운동에 참가하여 강화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여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토록 하고 경찰에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고 고창(高唱)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사국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순승
한자명
李淳承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08 ~ 1976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2년 5월 광복군(光復軍)에 입대 제2지대 제1구대원(區隊員)으로 활동 O.S.S훈련을 받음과 아울러 1944년 10월 제2지대 부관(副官) 1945년 청도지구(靑島地區) 지대장(支隊長)으로 교민보안관리, 한적 사병(韓籍士兵) 5,000여명을 인수 귀국케함.

이순승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윤문
한자명
李允文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2 ~ 1922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牧使)가 주동(主動)하는 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에 참가하여 강화(江華)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郡守)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하도록 하며 일경(日警)에 연행되어 있는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여 고창 시위하다가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윤문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준승
한자명
李濬承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19 ~ 1990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2. 중국(中國) 신향지구(新鄕地區)에서 광복군 공작원과 접선(接線) 적 후방 정보수집 공작원(敵后方情報蒐集工作員)으로 활동하다가 광복군 제2지대 1구대원으로 입대하여 활동하던 중 1945년 5월에 한미합작정보훈련(韓美合作情報訓練)을 받던 중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참여(參與)함.

이준승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중섭
한자명
李重燮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9 ~ 1996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1년 1월 경성(京城)에서 조선독립운동협회(朝鮮獨立運動協會)에 가담 활동중 용산서(龍山署)에 체포되어 1943년 2월 25일 경성지법(京城地法)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2년형을 받고 복역한 사실이 확인됨.

이중섭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희화
한자명
李熙和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20 ~ 2008
본적
경기도 개풍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4. 10월 광복군(光復軍) 제2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이희화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임두엽
한자명
林斗曄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1 ~ 1970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 8. 28 강화군(江華郡) 양사면(兩寺面) 철산리(鐵山里)에서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을 일으킬 목적(目的)으로 대형(大形) 태극기(太極旗)와 격문(檄文)을 작성(作成)하여 광장(廣場)에 게시(揭示)하는 등 주민(住民)의 독립운동(獨立運動) 참가(參加)를 촉구(促求)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명순
한자명
張明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9 ~ 1950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牧師)가 주동하는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 강화(江華)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郡守)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토록 하며 일경에 연행되어 있는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여 고창 시위하다가 피체되어 태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상용
한자명
張相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57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가 주동하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강화(江華)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郡守)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토록 하여 일경에게 연행되어 있는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여 고창(高唱) 시위하다가 피체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인애
한자명
曺仁愛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3 ~ 1961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가 주동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강화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토록 하고 경찰에게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고 고창(高唱)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조인애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조종환
한자명
趙鍾桓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0 ~ 1937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4

공적개요

1919년 3월 9일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溫水里) 기독교 교회당에서 3.1만세운동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여 시위를 주도하였고 동년 5월 말 서울에서 유경근(劉景根)을 통하여 대동단에 가입한 후 독립군(獨立軍) 장병을 모집하여 노령(露領)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았고 출옥한 후 1921년 3월에는 강화교회(江華敎會)에서 ‘조선 청년의 전도’라는 연설을 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조종환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황용근
한자명
黃用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1 ~ 1967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8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읍내(邑內) 시장에서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1만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황일남
한자명
黃日男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42
본적
경기도 강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8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가 주동하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강화장터에 모인 10,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강화군청(江華郡廳)으로 가서 군수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토록 하고 일경에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 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여 고창(高唱) 시위하다가 피체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황일남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