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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마을(어등산의병 전적지)

유형
조형물 | 비석
주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380-6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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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이 마을은 박산마을, 또는 박뫼마을로 불리는 의병마을로 광주광역시 어등산 자락에 자리한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이자 학자 송천 양응정이 들어온 이후 ‘박산(博山)’, 또는 박뫼라고 불리게 된 이 마을은 유교의 전통윤리인 충(忠), 효(孝), 열 (烈)을 지켜온 양씨 가문의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우리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의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 곳이다. 박산마을에 세워진 양씨삼강문은 제주 양씨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양응정의 아들인 양산숙이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고 정유재란 때는 양응정의 부인과 아들, 딸, 며느리 등 일가족이 왜적에게 굽히지 않고 자결했다. 또 정묘호란 때에는 양응정의 손자 양만용이 의병을 일으켰다. 박산마을에는 어등산 전투지이기도 했다. 어등산(293m)은 광주와 장성 그리고 나주와 함평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지리적 요충지로서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이 곳의 김태원, 김준, 조경환, 양동환, 김원범 등 의병장을 포함한 여러 의병이 어등산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인물정보

성명
김원국
한자명
金元國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91 ~ 미상
본적
평안남도 강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7

공적개요

1919년 3월 만세운동의 수모자(首謀者)로 일경(日警)의 감시를 받다가 6월 중국(中國) 안동현(安東縣)으로 피신하여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고 서간도(西間島)에 있는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한 후 고대춘(高大春), 고대하(高大廈) 등과 함께 활동하다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태원
한자명
金泰元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63 ~ 1933
본적
강원도 영월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895. 11월(음력) 경기도(京畿道) 이천(利川)에서 김하락(金河洛),구연영(具然英) 등과 함께 군사를 소집,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고 선봉장을 맡아 백현(魄峴),이현(利峴) 등지에서 일군(日軍)과 접전, 결승을 거두고 2,000여명으로 군세(軍勢)를 확충,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공략,점령하였으며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는 등 의기를 높이다가 적(敵)의 반격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잔여의병을 이끌고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합류하여 이강년(李康秊)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 유인석이 요동(遼東)으로 서행할 때 수행하였으며 1906. 3월 최익현(崔益鉉) 의병장이 거의하자 입진, 소토장(召討將)으로 활동하다 피체되어 3월여간 옥고를 치르고 1907년 재차 기의한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경옥
한자명
朴經玉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3 ~ 미상
본적
함경남도 함흥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22

공적개요

1920년 8월 평남 평양에서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의 폭파를 시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박봉석
한자명
朴奉石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5 ~ 1910
본적
전라남도 광주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8.11월 안규홍(安圭洪) 의병진(義兵陣)에 들어가 포군(砲軍)으로 임명(任命)되어 보성(寶城) 장흥(長興) 순천(順天)등지(地)에서 일군(日軍)과 교전(交戰)하면서 1909년 부하(部下) 7명(名)을 데리고 보성군(寶城郡) 복내(福內)장터에서 물품(物品)을 사고 있는 일군(日軍) 2명(名)과 한인 통역(韓人通譯) 1명(名)과 조우(遭遇)하여 일군(日軍) 1명(名)과 통역(通譯) 1명(名)을 살해(殺害)하고 일군(日軍) 1명(名)에게 중상(重傷)을 입히고 피체(被逮)되어 1910. 5월 교수(絞首)를 선고(宣告)받아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용식
한자명
朴龍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2 ~ 미상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19. 3. 21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 편항(鞭巷)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유동수(柳東洙), 유연성(柳淵成)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장터에 모인 5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주재소로 몰려가서 유리창을 부수고 내부의 서류, 기물을 파괴하는등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양상기
한자명
梁相基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3 ~ 1910
본적
전라남도 광산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후기 호남도단위 의병장으로 광주(光州), 화순(和順), 담양(潭陽), 남경(南京) 등지에서 일 수비대와 교전하여 전과를 거양하였으며,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대장으로 활약하다가 1908. 12월 체포되어 1910. 8. 1 사형이 언도되어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양진여
한자명
梁振汝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60 ~ 1910
본적
전라남도 광산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77

공적개요

호남(湖南) 의병장으로 대치산(大峙山)에서 일본수비대와 교전하고 연합부대의 일익으로 추월산(秋月山)에서 일군과 교전하는 등 혈전을 전개하여 피아(被我)의 손해(損害)가 많었으나 의병진의 용명을 떨쳤고 적의 형장에서 순국한 공적이 있으므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오성술
한자명
吳成述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4 ~ 1910
본적
전라남도 광산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77

공적개요

호남의병장(湖南義兵將)으로 담양(潭陽), 나주(羅州) 등지에서 일군(日軍)과 격전(激戰)하는 등 의병활동에 현착(顯着)한 공적을 세우고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기손
한자명
李起巽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7 ~ 1957
본적
전라남도 광산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77

공적개요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전남서부지방(광산(光山), 나주(羅州), 함평(咸平)) 의병장으로서 800여명의 의병을 지휘, 무기 천포대, 대완구, 양총 500 정(왜병노획무기)으로 무장하여 왜적장 길전(吉田) 외 왜적 200여명을 사살하여 소총 100여정을 노획하는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해병 명령(解兵命令)에 따라 함경도(咸鏡道), 로서아, 만주(滿洲) 등으로 망명, 다시 귀국하여 청장년 애국사상 고취 등 독립운동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 공적이 있어 그 내용을 광산(光山)교육청 발행 학생교재용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사천
한자명
鄭士千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3 ~ 1908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3

공적개요

1907년 음력(陰曆) 12월 전남(全南) 광주(光州)에서 기삼연 의진(奇三衍義陣)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며, 1908. 2. 22 일병(日兵)에게 체포되어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事實)이 확인(確認)됨.

인물정보

성명
조경환
한자명
曺京煥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6 ~ 1908
본적
전라남도 광주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1907년 12월 광주(光州), 함평(咸平) 등지에서 이원오(李元五), 김동수(金東洙), 양상기(梁相基)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태원(金泰元)의 좌익장(左翊將)이 됨 2. 1907년 12월 14일 함평성문(咸平城門)을 급습하고 학포마병대(鶴浦馬兵隊)를 습격하는 동시에 김박사(金博士), 이진사(李進士) 등과 합세하여 선봉장이 됨 3. 1907년 12월 18일 전남 장성(全南長城) 부근에서 부하 200명과 더불어 일헌(日憲)과 교전함 4. 1907년 12월 27일 영광군사창(靈光郡社倉) 습격 군량확보 5. 1908년 호남창의대장(湖南倡義大將)이라 칭하고 각지 향교(鄕校)에 수차 독립격문을 발송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킴 6. 1908년 1월 1일 일 길전부대(日吉田部隊)와 교전하여 길전(吉田)을 포살(砲殺)하고 적군수명을 격살하는 동시에 광주(光州), 나주(羅州), 장성(長城), 함평(咸平) 등지 기타 수차 일군(日軍)과 교전함 7. 1908년 11월 25일 전해산(全海山), 유완요(柳完堯), 전효군(全孝軍)과 연합하여 일군과 교전 수(數) 10명을 사살함 8. 1909년 1월 10일 광주군 소지면 어등산(光州郡所旨面魚登山)에서 일병(日兵)과 교전중 33세를 일기로 전사함 (공적서에는 1908. 12. 19) ( 폭도사자료(暴徒史資料) 27호, 폭도편책(暴徒編冊) 28호(속(續)) 38호, 폭도통계자료(暴徒統計資料) 160, 폭도토벌지(暴徒討伐誌)(407) 252,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60)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