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영 출생지 기념비
함태영(1872 - 1964)은 일제강점기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 1873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 출생. 아버지는 함우택(咸遇澤)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다. 광복 후 심계원장(審計院長),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84년(고종 21)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격동하는 내외정세 하에서 사숙(私塾)을 전전하면서 학문을 깨치는 한편, 밀려오는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에 따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듬해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보였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는데, 사태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한 함태영은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大審院) 판사, 복심법원(覆審法院) 판사를 역임하면서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벗어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한편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버지가 일찍부터 기독교신자로 장로의 직분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교회활동을 통하여 극복해 나갔다. 1919년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계획이 구체화되자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되었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그가 감리교 세력을 흡수하여 3·1운동을 이끌었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통령에게의 독립선언서 발송, 독립선언서의 지방배포 등을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으나, 자신은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최린(崔麟) 등의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았다. 3·1독립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종교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고, 1946년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었던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을 지냈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발췌개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