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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추모비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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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사적지
김용원(1892-1934)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김용원은 향리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는 황포(黃埔)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김용원은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 나창헌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강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강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구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지도하기 위해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 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진, 신익희, 이진산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병에 걸려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 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같은 해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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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묘
김용원(1892-1934)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김용원은 향리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는 황포(黃埔)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김용원은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 나창헌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강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강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구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지도하기 위해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 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진, 신익희, 이진산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병에 걸려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 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같은 해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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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갑 묘
김재갑(1880-1926)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4월 8일 상주군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화북면 장암동 구장인 이성범, 홍종흠, 이용회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에는 인근 지역에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오후 2시경이 되자. 1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문장산에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탐지한 상주 일본군 헌병 대장 이하 수많은 헌병들이 와서 시위를 제지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다가 결국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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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독립운동기념비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학생독립운동기념비이다. 비는 한밭대학교의 전신인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 학생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본 사적은, 개교 91주년을 기념하여 한밭대학교 도서관 앞 광장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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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병 사적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본 비는 유성을 비롯한 대전 일대의 사민들이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으킨 유성의병을 기리는 사적이다. 유성의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으로, 1895년 문석봉이 국수보복론(國讐報復論, 국가의 원수에게 보복한다)과 주욕신사(主辱臣死,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치욕을 씻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의 정신에 입각하여 중신들의 찬동을 얻어 지방 사족들과 함께 일으켰다. 이들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공주의 와야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이고 왕촌 일대로 피신하였다가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의병장 문석봉이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성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단발령 공포 후 전국적으로 의병봉기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위와 같은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한 고귀한 투쟁의 사적을 후세에 알려 기리고자 2004년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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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대전시 유성구 장동에 위치한 충렬사는 독립운동가 민영환, 최익현, 이준, 안중근, 윤봉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1997년부터 매년 5월 3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68년 건립된 충렬사는 당시 충남 대덕구 탄동면 장동리(현재 유성구 신성동~도룡동 일대)에 사는 여흥 민씨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충정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건립했다. 유성구에 위치한 우성이산이 여흥 민씨의 선산이기도 하다. 2018년 12월, 대전지방보훈청이 충렬사를 현충시설로 등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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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수 구 묘
이권수(1894-1937)는 충청남도 대덕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집에서 이상수와 함께 조선의 독립을 동리 사람에게 알리자는 뜻으로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마을 중심지인 높은 곳에 세워두고, 이튿날 사용할 소형 태극기 17개를 미리 만들었다. 3월 16일 오후 1시경, 이상수와 함께 소형 태극기를 가지고 유성 장터로 가서 독립만세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이정석 등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약 20명의 시위군중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상수와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장터를 행진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그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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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순국기념비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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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두 추모비
권용두(1914-1992)는 1926년 6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6·10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무기정학을 당하였고, 1929년 4월 선우회(鮮友會)에 가입하여 일본인 하급생인 멸시태도를 제재하려고 구타하여 징계를 받았다. 1931년 1월 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에 가입하여 일제식민통치를 규탄하고, 농민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정신 고취 및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1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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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헌(신채호 생가 홍보관)
2015년 12월 8일 선생의 탄신일 135주년에 맞춰 개관한 신채호 생가 홍보관이다. 본래 생가 관리사로 건축되었던 단재헌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건물로 신채호 선생의 출생과 성장, 가족사와 그의 독립운동 일대기를 콘텐츠로 제공한다. 홍보관 출구 쪽 벽면엔 조선혁명선언, 대한협회회보, 조선사 총론 등에 담긴 내용들이 전시돼 있다. 단재의 흔적이 깃든 옛 성균관 명륜당, 오산고 제1회 졸업식, 해조신문 발행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사진도 걸려있다. 영상관에선 단재의 역사관을 담은 10분 분량의 영상이 재생된다. 단재의 민족 독립 운동 역시 일대기 형식에 맞춰 각 주제마다 단재가 저술한 책이나 기고한 논설 등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중심사건을 미니어처 인물모형으로 묘사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 활약하던 단재가 투옥되는 순간,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무력투쟁을 주장하는 모습,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는 모습, 여순감옥에서의 마지막 모습 등이 재현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생가는 진외가(할아버지의 처가)인 안동 권씨 문중이었다. 그러다가 1887년, 선생 나이 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도리미 마을을 떠나 충북 청주로 옮겨간다. 생가터인 도리미 마을(대전시 중구 단재로 229번지)은 `88년 생가터임이 확인되고 `91년 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2000년까지 토지매입 및 동상건립, 생가복원 등이 완료되었다. 홍보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생가 터에는 안채와 곳간채 등 복원한 초가 건물이 조성되어있으며 단재 선생의 시와 동상이 함께 건립되어 있다.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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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대전형무소(기억의 터)
대전형무소는 서울 아래 지역의 독립운동가, 정치적인 사상과 관련해 범죄를 저지른 사상범 등 사상범을 수용하는 곳이었으며 현재는 하나의 망루와 우물만 남아있다. 1930년에는 독방 80칸이 만들어졌고 1933년에는 사상범 감옥으로 지정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계속해서 만세운동이 이어져 수감자가 증가하게 되자 1939년 형무소로 그 규모를 확장하였다. 안창호와 여운형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공사 당시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 하나씩 망루가 있었지만 현재는 하나의 망루만 남아 있다. 근처의 작은 공원에는 구 대전형무소에 대한 디지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기억의 터’라는 조형물을 조성하여 대전형무소의 역사,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 등에 대한 기록을 전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