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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독립운동 유적지(일산역)
고양 독립운동유적지 일산역(一山驛)은 경의선의 중심역으로 고양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지역으로서 일본 헌병이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수색역 이전에 있어 국내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일산역 부근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월 25일 고양군 중면 일산리에서 16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해산하였다. 이튿날 3월 26일 일산리 일산 장날을 맞아 500여 명이 인근의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부 주민들은 일본 경찰의 과잉 진압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근처의 일본 가옥에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일본 헌병은 만세운동 지도자 15명을 체포했다. 이외에도 3월 27일 당시 일산 지역 주민 150명 정도가 늦은 시각까지 횃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실행했는데 시위 주도자 19명 가운데 면서기도 1명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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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리 헌병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일산리 헌병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고양군 중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에 당시 고양군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중면 면장은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에 참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헌병대에게 주민들의 동향을 전달하였다. 이를 알게 된 주민들이 면장을 응징하고자 주장하는 등 항일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3월 25일에 50여 명의 주민들이 일산리 헌병 주재소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인 26일에는 500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28일 밤에는 150여 명의 주민들이 횃불을 밝히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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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3.1운동 만세 시위지
남태령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과천면 주민이었던 이복래 등이 주도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이복래는 본래 시흥 출신으로 시위 당시에는 과천면 하리에 살았다.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인근 주민들에게 3월 30일 오후 8시까지 남태령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주민들이 모이자 그들에게 손수 제작한 태극기 15개를 나누어 주었다. 이복래와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함께 과천 읍내로 행진하여 경찰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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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석 묘
성기석(1920 - 1990)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조선방송국(朝鮮放送局)과 개성방송소(開城放送所)에서 근무하면서 단파수신기(短波受信機)를 제작하여 해외방송을 청취하면서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연합군(聯合軍)의 승전과 광복군(光復軍)의 활동 등 국제정세를 수시로 청취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였다. 1942년 12월 27일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으며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무신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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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석 공적비
성기석(1920 - 1990)은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40년 조선방송국(朝鮮放送局)에 기술직으로 근무할 때 단파수신기(短波受信機)를 제작하여 해외방송을 청취하면서 임시정부(臨時政府) 소식과 구미외교부(歐美外交部) 활동을 알게되어 독립운동 상황을 가친(家親)을 통하여 이인(李仁)·조병옥(趙炳玉) 등에게 전달하였다. 1942년 8월 개성방송소(開城放送所)로 전근되어 소장인 이인덕(李仁德)과 단파수신기를 제작하여 미국과 임시정부의 한국어 방송을 통하여 연합군(聯合軍)의 승전과 광복군(光復軍)의 활동 등 국제정세를 수시로 청취하여 민족지도자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1942년 12월 27일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무신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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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3월 27일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정석(李貞石)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지역주민 200여 명이 모여 주재소를 중심으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이정석의 구출을 꾀했으나, 모두 체포되어 주동자들은 최고 4년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과 함께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광복 후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및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광명시에서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애국심을 기리고자 1995년에 3.1독립만세운동 광명 지역 발상지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2002년 11월 30일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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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온사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흥군 서면 주민 2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7일 밤에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살던 이정석이 노온사리 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다음 날 강제 연행되었다.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호천과 윤의병은 이종원, 최정성, 유지호, 김인한, 최주환 등과 함께 이정석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3월 28일 오후 11시 무렵에 서면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일본 경찰이 파견되어 최호천 등을 체포하였고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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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찬영 구 묘
황찬영(1892 - 1972)은 평남 대동(大同) 출신으로, 평양숭덕학교(平壤崇德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광무황제(고종)동도식(光武皇帝奉悼式) 명목으로 예배당에 군중을 모이게 하여 찬송과 기도를 드린 후 미리 준비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시내 각 처에 배포하면서 이날 모인 기독교인·학생·주민 등의 선봉 대열에서 활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해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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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3.1독립 운동 기념탑
본 기념탑은 경기도 광주에서 전개된 3.1운동 정신을 기리고, 의병들의 치열했던 항쟁사 속에 구국정신과 그분들의 혼을 새기고 후세에 선열들의 얼을 계승하고자 2012년 3월에 건립되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광주시 3.1독립 운동 기념탑은 경안근린공원 내에 위치한 횃불 모양의 기념탑으로, 작품 공모를 통해 선정된 디자인으로서 2012년 3월에 준공되었다. 기념탑의 높이는 11m이고, 탑신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3.1운동의 역사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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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 운동지
광주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 운동지는 학교 당국의 민족 차별에 맞서 광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일으킨 곳이다. 1921년 8월 4일에 일본인 목수가 한국인 학생인 황추호를 구타하여 실신시켰으나 경찰에서 훈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8월 29일에 무더기로 휴학원을 제출하며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이에 8월 30일과 31일에 학부모들이 회의하여 일본인 목수를 고소하였고 결국 목수는 재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교육 당국의 민족 편견과 차별에 맞서 항일 민족정신을 표출한 사례로써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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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군청 3.1운동 만세 시위지
광주군청 3.1운동 만세시위지는 3.1운동 당시 대규모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1시 30분경, 오포면의 고산리(高山里)와 문형리(文衡里)로부터 시작된 1,500여 명의 오포면 시위 군중은 행진을 시작했고 경안면 주막리 군청 앞에 도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오포면의 시위군중이 행진해 오는 동안 경안면 주변 지역의 주민 다수가 시위대열에 차츰 가담하였다. 거기에 주막리의 주민까지 합세하니 시위 군중은 2,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무렵에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군청 건물 앞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군청사와 광주우편소 건물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렸다. 시위대가 총기 탈취를 시도하자 헌병들이 이들을 향해 발포하였고, 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 당하였다. 다음 날인 29일에도 경안리 부근에서 200~3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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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승 독립기념비
이병승 선생은 광주군 실촌면에서 태어나 애국자로서 일본 압정에서 대한독립을 외치신 선구자로, 고종 승하 소식에 상경하여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받아 귀향한 후 의거하였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선두에서 행진하였다. 왜병의 총격에 강원도를 거쳐 만주로 피신하셨다가 고국에 돌아와 해방 이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시고 애국정신과 구국정신을 널리 후손에게 알리셨으며, 83세까지 만선리에서 사시다가 1973년 1월 21일 돌아가셨다. 3.1운동 이병승 독립기념비는 만선리 노인회에서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