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용 유허비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