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이상관 기적비
이상관(1891-1936)은 경상남도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중국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남구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및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재정 부장(財務 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1937년 1월, 일본군 동변도특별공작부(東邊道特別工作部)에 의해 체포되어 피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손호 사적비
손호(1897-1936)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22년부터 영남 일대에서 민족자결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 신민부(新民府)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이병묵, 신현규, 손봉현, 윤창선 등과 함께 대구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8년 5월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등의 죄명으로 징역 10년 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옥고로 1936년 8월 23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손호 묘
손호(1897-1936)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22년부터 영남 일대에서 민족자결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 신민부(新民府)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이병묵, 신현규, 손봉현, 윤창선 등과 함께 대구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8년 5월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등의 죄명으로 징역 10년 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옥고로 1936년 8월 23일 옥사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상윤 의열투쟁기념비
김상윤(1897-1927)은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 동지들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그는 1920년 2월 상해에서 폭탄을 구입하여 국내로 반입한 후 밀양경찰서 투탄 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도피하였으며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중 1922년 3월 이종암 등과 다나카(田中) 대장 처단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10월 19일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원형 기적비
최원형(1901-1945)은 경남 사천의 학생이었다. 1919년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으며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였고, 1921년 일본으로 유학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이를 조국 독립의 호기로 생각한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자 일본에서 귀향하는 한 소녀를 통하여 고향 친구이며 자산가인 정재홍에게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송금해 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일경에 밀고됨으로 인해 1942년 2월 일본에서 붙잡혀 경남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1942년 6월 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8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문시환 추모비
문시환 선생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동 회의에 참가하여 노동위원(勞動委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말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말 의열단 총회에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거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자, 그는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로 밀파되어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문시환 묘
문시환 선생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동 회의에 참가하여 노동위원(勞動委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말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말 의열단 총회에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거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자, 그는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로 밀파되어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흥교 묘
한흥교 선생은 부산 동래(東萊) 사람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본 강산(岡山)의학전문학교 졸업 후인 1911년 10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군 구호의장(救護醫長)으로서 소주(蘇州), 진강(鎭江) 등 전선에서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북벌혁명군(北伐革命軍) 홍십자회(紅十字會) 대장으로 피명되어 활동하였으며, 항주(杭州) 및 북경(北京)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재직하였다. 1912년에 상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과 함께 동제사(同濟社) 조직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자들의 의료를 전담하였으며, 1914년 상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신채호와 함께 중외통신사(中外通信社), 전광신보사(展光新報社) 창립에 참여하고 노령(露領), 미주(美洲), 중국 각지에 신문을 발송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25년 6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원세훈(元世勳) 송 호(宋虎) 등 동지들과 선두자사(先頭者社)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를 발행하는 등 중국국민과 연합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한 중연합으로 "타도일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북경(北京), 천진(天津) 등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산서성 태원(山西省 太原)에 정착하여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한 뒤,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안창제 집
안창제(1866~1931) 선생은 경남 의령(宜領) 사람이다. 안효제(安孝濟)의 서제(庶弟)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조서가 내려가자 갑오토역(甲午討逆) 상소를 올리고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당했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생을 대표하는 유약소원(儒約所員)으로 연이어 3번이나 소(疎)를 올려, 오적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광복의 큰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朴長浩)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여 일경과 밀정을 다수 사살하였다. 1919년에는 중국측에서 조직한 전국유교연맹 동삼성(東三省)학회 분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8월 13일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일가족이 장학량(張學良)의 패잔병에게 총살당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광 묘
최광(1882~1918)은 경남 의령(宜寧) 사람이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학전문과(經濟學專門科)를 졸업한 뒤 탁지부(度支部)에 들어가 국망(國亡) 직전인 1910년 3월까지 주사(主事)로 근무하였다. 1908년 3월에는 영남지방의 교육진흥과 인재양성을 목표로 서울에서 박정동(朴晶東)·이하영(李夏榮) 등이 발기하여 조직된 교남학회(嶠南學會)에 참여, 박정동·이각종(李覺鍾) 등과 함께 평의원(評議員) 2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1910년 러시아로 망명해 동년 8월 일제의 한국 병탄(倂呑)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이의 무효를 선언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宣言書)가 발표될 때 서명하여 항일의지를 천명하였다. 1911년에는 이갑(李甲)을 보좌하여 미주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지방총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국민회의 원동(遠東) 경영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페테스부르크 지역의 경영 실무를 서초(徐超)와 함께 담임하는 한편, 미중서 발행하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원동(遠東)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1913년 3월 26일 개최된 국민회 시베리아지아총회 제1회 대의회(代議會)에서 대표원(代表員)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강(李剛)·김탁(金鐸)과 함께 기초위원(起草委員)으로 선정되어 총회의 자치규정(自治規程)을 기초하여 총회의 승인을 받아 통과시키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창제 사적비
안창제(1866~1931)는 일제강점기 만보산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로 안효제의 동생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조서가 내려가자 갑오토역(甲午討逆) 상소를 올리고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당했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생을 대표하는 유약소원(儒約所員)으로 연이어 3번이나 소(疎)를 올려, 오적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朴長浩)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여 일경과 밀정을 다수 사살하였다. 1919년에는 중국측에서 조직한 전국유교연맹 동삼성(東三省)학회 분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8월 13일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일가족이 장학량(張學良)의 패잔병에게 총살당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허만준 묘
허만준(1925~1984)은 일본 대판 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41년 9월에 학우 전영수(田永秀)·남상순(南相淳) 등과 함께 일본인의 한인학생 및 재일동포에 대한 민족차별에 분개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충성회(忠誠會)를 조직하였고, 1942년 12월까지 30여차례의 모임을 가지며 항일활동을 펴 나갔다. 동회의 운동방략으로는 고향에 야간사숙을 열고 수시로 귀국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일·소가 개전하면 즉시 귀국하여 국내의 청소년층을 지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독립운동이 실패하였던 것은 실력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라 분석하고 실력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안중근(安重根)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생각하며 항일정신을 길러갔다. 그러던 중 1942년 12월에 충성회의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43년 1월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2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