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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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수 추모비
안천수(1913 - 1963)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며, 이명은 안용관이다. 그는 1934년 12월 27일 울진군 서거면(書居面) 윤경복(尹敬福)의 이발소에서 황명칠(黃明七)·안태열(安泰烈)·안병극(安炳極) 등과 모임을 갖고 국내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본인은 일시동인(一視同仁) 운운하면서도 제도적으로 민족차별을 하고 있으며 일제는 결국 한국인을 아사(餓死)시킬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조국독립운동을 위한 항일결사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직결성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던 중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935년 9월 1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동년 10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울진군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사찰과장(査察課長)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병두 기념비
김병두(1897 - 1985)는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16년 9월에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그는 동년 12월에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로 망명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滿洲)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김영찬(金永燦)을 만나서 〈독립신문(獨立新聞)〉등 다수의 문서를 교부받았다. 그리하여 고향에 돌아와 교회를 통하여 이 문서들을 배부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1921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 울진지청(蔚珍支廳)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목익, 이화익 기념비(금천리)
이목익(1868 - 1949)은 경상북도 울진 사람이다. 1920년 울진군(蔚珍郡) 온정면(溫井面) 소태리(蘇台里)에서 일제(日帝)의 생산품을 배척하자는 문서를 소태 주재소(駐在所) 앞과 온천장(溫泉場) 숙소 및 선미리(仙味里), 온천리(溫泉里) 2곳과 평해면(平海面) 평해시장(平海市場)에 각 1매씩 붙였다. 또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 금융조합(金融組合)과 왜인고리대금업자(倭人高利貸金業者)의 착취로 한국인의 파산이 날로 늘어나자 같은 해 10월 22일에 일본물품배척포고문(日本物品排斥布告文)을 각 요소에 게재하고 조국의 토산물(土産物) 애용을 호소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20년 12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화익(1871 - 1933)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3일 경북 울진군 부흥(復興)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의 인근지역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데 비해, 울진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 동편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만세운동의 소식을 늦게 접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이화익은 뒤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4월 초부터 울진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는 김광수(金光壽)·남병모(南炳貌) 등과 4월 13일 부흥 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에 이화익은 부흥 장터에 운집한 수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마침 출장중인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오히려 군수에게 한국인으로써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군수로 하여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도중 그는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혀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공무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목익, 이화익 기념비(소태3리)
이목익(1868 - 1949)은 경상북도 울진 사람이다. 1920년 울진군(蔚珍郡) 온정면(溫井面) 소태리(蘇台里)에서 일제(日帝)의 생산품을 배척하자는 문서를 소태 주재소(駐在所) 앞과 온천장(溫泉場) 숙소 및 선미리(仙味里), 온천리(溫泉里) 2곳과 평해면(平海面) 평해시장(平海市場)에 각 1매씩 붙였다. 또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 금융조합(金融組合)과 왜인고리대금업자(倭人高利貸金業者)의 착취로 한국인의 파산이 날로 늘어나자 같은 해 10월 22일에 일본물품배척포고문(日本物品排斥布告文)을 각 요소에 게재하고 조국의 토산물(土産物) 애용을 호소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20년 12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화익(1871 - 1933)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3일 경북 울진군 부흥(復興)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의 인근지역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데 비해, 울진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 동편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만세운동의 소식을 늦게 접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이화익은 뒤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4월 초부터 울진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는 김광수(金光壽)·남병모(南炳貌) 등과 4월 13일 부흥 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에 이화익은 부흥 장터에 운집한 수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마침 출장중인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오히려 군수에게 한국인으로써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군수로 하여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도중 그는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혀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공무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황만영 기념비
황만영(1875 - 1939)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 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향리에 주둔하고 있던 성익현(成益鉉) 의진(義陣)에 군자금 8백 냥을 지원하면서 의병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향리인 사동(沙銅)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1913년에는 노령(露領)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였던 그는 1919년 9월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정의부(正義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이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吉林)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성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蔚山支會)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재화 기적비
박재화(1890 - 1928)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2년 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에 조직되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목표로,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무대로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1년 말 군자금 마련을 위해 흥업단장 김호(金虎)는 이만준(李萬俊) 등 4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이 지역의 자산가(資産家)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위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화는 이들의 뜻에 적극 찬동하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고, 권충락(卷忠洛)·홍종락(洪鐘洛)·김종만(金鐘萬) 등과 함께 경북 청도(淸道)·영천(永川)·달성(達城) 등지에서 친일자산가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경, 군자금 모집을 활동 중 홍종락·이재술(李再述) 등이 군위(軍威)에서 일경에 붙잡히고 일경의 포위망이 점차 좁아지자, 그는 의성군 금성면(金星面) 학미동(鶴尾洞)에 은둔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중수 기념비
권중수(1896 - 1980)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5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결성한 1910년대의 대표적 국내 혁명단체로서, 전국적인 조직과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 기지와도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결성 초기부터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18년에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일제의 검거망을 피했던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 8일 대구(大邱)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가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재화 묘
박재화(1890 - 1928)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2년 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에 조직되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목표로,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무대로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1년 말 군자금 마련을 위해 흥업단장 김호(金虎)는 이만준(李萬俊) 등 4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이 지역의 자산가(資産家)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위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화는 이들의 뜻에 적극 찬동하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고, 권충락(卷忠洛)·홍종락(洪鐘洛)·김종만(金鐘萬) 등과 함께 경북 청도(淸道)·영천(永川)·달성(達城) 등지에서 친일자산가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경, 군자금 모집을 활동 중 홍종락·이재술(李再述) 등이 군위(軍威)에서 일경에 붙잡히고 일경의 포위망이 점차 좁아지자, 그는 의성군 금성면(金星面) 학미동(鶴尾洞)에 은둔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석홍 기념비
박석홍(1896 - 1985)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0년 중국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조선인청년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1924년 흑룡강성 산시(山市)에서 신민부(新民府) 기관지 〈신민보〉(新民報)의 논설위원으로 배일사상 확산을 위한 선전활동에 진력하였고, 1925년 아성(阿城)에서 김 훈(金勳) 등과 함께 잡지 〈혈청년〉(血靑年)을 발간하여 혁명적 국권회복 방략의 당위성과 그 투쟁방법을 선전하였으며, 1927년 이백파(李白波)와 함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중앙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의 일본인 집단살해 계획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1927년 1월 중국 중동선(中東線) 해림(海林)에서 단두단(斷頭團)의 명의로 경북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의 이동빈(李東彬)에게 독립운동 자금 1만 5천 원의 기부를 요구하는 편지를 띄워 놓고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일경에 붙잡혀 동년 9월 2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무정부주의 노선으로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동지들의 사산(四散)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한 뒤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면서 20여 회의 예비검속까지 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경성 기념비
김경성(1879 - 1943)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경북 김천군(金泉郡) 개영면(開寧面)에서 3·1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같은 해 10월경 군자금 1,000원을 개인 재산의 처분으로 마련하는 한편 동삼성(東三省)에 이동녕·이시영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하여 동삼성(東三省) 안동현(安東縣)으로 가서 조강제(趙强濟)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시목 기념비
박시목(1894 - 1944)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북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2월 동회의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출되어 민족정신 고취 내용의 격문 등을 살포하며 활동하였다. 그후 1930년 대구 근교 팔공산(八公山)에서 광선 경영을 위장하여 박영덕·이상훈·심재윤·노석호·김 인 등 애국지사를 규합하였으며, 청년동지들을 연안(延安)으로 밀파하여 독립군(獨立軍)에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는 종교계와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의 무력항쟁 및 중국의 광복군(光復軍)과 합세하여 대일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등을 계획하던 중 아들 희규를 포함한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북경(北京)에서 일경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아들과 함께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항일독립의거추모탑
항일 독립 의거 추모탑은 1919년 3월 14일 유천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과 왜인 응징사건, 그리고 내호리를 중심으로 당시 항일 독립 운동을 했던 동진회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유천장터 독립만세운동이란 1919년 파고다공원에서의 3.1독립만세운동에 호응하여 김보곤은 마을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명학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3월 14일 유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일이다. 그러나 헌병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의명학당은 독립활동 모의거점으로 지목되어 폐쇄하였다. 이후 유호동장은 헌병대에 소환되고 자제단 가입을 주민에게 강여 주지하였다. 왜인 응징사건은 이어서 5월 7일 아침 7시경 청년 20여 명이 유천역에 정차중인 만주행 군용차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소동을 벌인 일로부터 시작한다. 오전 10시경 독립만세 함성에 주민 모두가 유호장터에서 감행하고 오후 4시경에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다시 저녁 7시경 유호장터에서 "왜놈들아 물러가라!" 고함치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인이 칼을 가지고 이종현의 입술을 결단내는 야만적 행동을 벌이자 급격히 운집한 주민은 왜인 7명을 처참하게 응징하였다. 결국 대구 헌병대가 저녁 9시 반에 군용차로 출동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또한, 1941년 설을 맞아 청도군 유호리의 청년 10여 명이 모여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으고, 1월 27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그 결사의 이름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일본 제국을 무너뜨리자’는 의미로 동진회(東進會)라 하였다. 본 단체는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로서 일제의 군수품 수송을 방해할 목적으로 철도, 경찰, 관공서 등의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또 농민회를 통해 농촌에 강요되는 황국신민화정책, 일상생활 통제의 국가총동원 체제 등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소년독성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장차 동진회의 행동 대원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1943년 9월 동진회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5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10명은 1944년 12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허남귤과 이길우 두 사람은 부산형무소에서 옥중 사망하였다. 이상도(李相道)를 제외한 나머지는 공판 계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