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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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순교기념동판
주기철(1897~1944)는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吉善宙)목사의 후임으로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 신도들에게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창신학교 표지석(마산합포구 상남동)
창신학교 표지석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제일문창교회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마산 최초의 민족 사랍학교였던 창신학교가 있었던 자리이다. 학교는 멸실되고 터만 남았다. 1908년 9월 호주 선교사인 손안로 목사(초대 교장)와 남하 이승규 장로의 선구적인 활동으로 사립창신학교를 개교하였고, 1909년 8월 남.여공학 사립 초등과 창신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아 1911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1939년 3월 초등과 제28회를 마지막으로 같은 해 7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폐교되었다.
은상이샘(이은상 우물)
이은상(1903~1982)은 1928년에 계명구락부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에는 월간잡지 『신생(新生)』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에 35회에 걸쳐 빼앗긴 조국의 국토와 문화재에 얽힌 심정을 술회한 「향산유기(香山遊記)」를 연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4년 국가적 인재를 양성할 교육기관으로 양사원(養士院)을 설치할 것을 이극노(李克魯)·안호상(安浩相)·이윤재(李允宰) 등과 추진하였다. 1937년에 조선일보에 「한라산 등반기(漢拏山登攀記)」, 1938년에 「지리산 탐험기(智異山探險記)」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1938년에 조선일보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의 명칭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으로 표기하는 것을 반대하고 동년 6월에 사직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일제강점기간에 한국민족 고유의 시조(時調) 분야에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민족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마산노동야학 표지석
마산 노동야학터는 개항기 경상남도 마산 지역에 국내 최초로 설립되었던 비정규 교육 기관으로, 일제 강점기 교육 시설의 부족과 민중의 극심한 생활 궁핍으로 대다수 아동과 젊은이들이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마산 노동 야학의 교장은 옥기환 선생이었으며, 처음 학생 수는 20~3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주로 어시장 어물상의 고용원이나 공장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아이들이었으며 수업 연한은 1년이었다. 교과목은 조선어, 일본어, 한문 등이었는데, 조선어를 주로 가르쳤다. 교사들은 대부분 창신 학교의 교사들이었으나 김철두, 명도석, 김용환 등과 같은 청년 지식인도 노동 야학의 교사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민중의 각성과 계몽이 독립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인식으로 보수 없이 무료로 교육을 담당하였다. 노동 야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재 등도 무료로 지급하였다. 1914년 10월에는 기존의 교사를 대신하여 마산시 창동에 교실 여섯 개의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이것은 옥기환 선생이 주도적으로 나서 1300원의 거금을 조달하여 보다 많은 학생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김상집, 전익진 장학추모비
김상집과 전익진은 1919년 3.1운동에 구국청년으로 항일운동에 참가하였으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향리로 돌아왔다. 그들은 전 재산을 육영 사업의 기금으로 하여 사립 창동학교(私立 昌東學校) 설립을 위시(爲始)하였고 여항공립보통학교(艅航公立普通學校)의 승격까지 지원하며 인재 양성에 뜻을 모았다. 이와 같은 두 인물의 공훈을 기념하고자 본 비가 건립되었다.
이은상 시비
노산 이은상(1903~1982)은 1928년에 계명구락부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에는 월간잡지 『신생(新生)』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에 35회에 걸쳐 빼앗긴 조국의 국토와 문화재에 얽힌 심정을 술회한 「향산유기(香山遊記)」를 연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4년 국가적 인재를 양성할 교육기관으로 양사원(養士院)을 설치할 것을 이극노(李克魯)·안호상(安浩相)·이윤재(李允宰) 등과 추진하였다. 1937년에 조선일보에 「한라산 등반기(漢拏山登攀記)」, 1938년에 「지리산 탐험기(智異山探險記)」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1938년에 조선일보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의 명칭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으로 표기하는 것을 반대하고 동년 6월에 사직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일제강점기간에 한국민족 고유의 시조(時調) 분야에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민족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창신학교 표지석(마산회원구 회원동)
창신학교는 1906년 경상남도 마산에 설립되었던 초 · 중등 과정의 사립학교이다. 1906년 5월 17일에 이승규가 독서숙(讀書塾)을 설치하였고, 2년 후인 1908년에서야 인가를 받아 마산시 상남동에 사립 창신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교육목적은 교육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을 배양하고, 민족의식의 고취를 함양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교과서는 애국심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교정에 태극기를 달았으며 모든 모임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에 마산에서 발생한 ‘기미만세의거(己未萬歲義擧)’에서 그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선교사들은 1924년 마산시 회원동(현 창신중·고등학교 자리)에 본격적으로 신축교사를 마련하여 정규 중등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 탄압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창신중학교는 1931년에, 창신초등학교는 1939년에 폐교 되었다. 1948년 창신학교가 재건된 이후 초등과는 재건하지 않고, 정부의 학제에 따라 중·고등학교 만을 재건 운영하고 있다. 창신학교는 멸실되고 터만 남았다.
주기철 기념관
주기철 목사는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熊川靑年運動團)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議事)로 선출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고 1926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다가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文昌敎會)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吉善宙)목사의 후임으로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언도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기철 집 터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熊川靑年運動團)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議事)로 선출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고 1926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다가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文昌敎會)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吉善宙)목사의 후임으로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기철 기념비
주기철 목사는 경남 창원 사람이다.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로 선출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26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다가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목사의 후임으로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언도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기효 공적비
주기효(朱基孝, 1877~1941) 웅천 북부 출생. 자(字)는 우원(于願), 아호(雅號)는 석천(石泉). 일찌기 근대교육기관으로서 1906년 웅천사립개통학교(熊川私立開通學校)와 여자전문학교인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설립, 웅천의 후진들을 위한 육영사업을 한 선각자이다. 더 많은 교양과 지식을 보급하고자 웅천도서원(熊川圖書阮)을 개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 주며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실업조합(實業組合)과 흥업조합(興業組合)등을 설립하여 민족실업 진흥운동을 전개 하기도 하였다. 이 공적비는 웅천의 국도변에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41년 9월에 세운 것으로 1873년 11월에 어지럽게 관리되고 있는 공적비를 안타깝게 생각한 당시 김준봉 웅천동장이 웅천초등학교의 설립자 공적비이기에 사비를 들여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왔다.
신간회 하동지회 표지석
하동청년회관은 하동지역 청년운동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이 회관은 3·1정신을 계승하여 민중계몽, 독립정신 함양 등 향토의 민족교양강좌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자 1926년 하동청년동맹이 앞장서고 독지가들의 출연으로 하동읍 읍내리 441-1번지에 건립하였다. 1927년 8월 20일에는 하동청년동맹이, 1927년 10월 20일에는 신간회 하동지회가 창립식을 갖는 등 하동지역의 청년운동과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이후 일제는 이 회관을 하동청년단체의 독립운동 장소로 여겨 하동읍 공회당으로 쓰도록 건물 용도를 변경하였다. 광복 후에는 고등공민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하동문화원 건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