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강석기 추모비
종문도사교성사 호석 강석기 선생 추모비는 충남 부여에 위치한 강석기의 비이다. 강석기의 이명은 강우(姜虞), 강호석(姜湖石)이며, 대종교 교주 다음의 최고위 직책에 임명되었고, 북로군정서의 고문도 함께 맡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만주로 망명 후 활동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체포되어 귀향조치되었다. 둘째 아들 강철구, 조카 강일, 야학운동을 한 강성모, 강일구, 강병국 등도 애국지사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추모비(한산면 종지리)
이상재(1851-1927)는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고,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낙향하였다. 이후 1896년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추대되었고,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집, 기념관
이상재(1851-1927)는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고,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낙향하였다. 이후 1896년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추대되었고,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수학지(봉서사)
이상재(1851-1927)의 호는 월남(月南)이며,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고,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낙향하였다. 이후 1896년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추대되었고,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근주 묘
이근주(1860 - 1910)의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淸狂)이다. 1860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고, 이후 독학으로 학문을 일궜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김복한 등 홍주의병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에는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지 울분을 이기지 못해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이 생겼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9월 23일 자결하였다. 이근주는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뜻의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라는 여덟 글자를 유언으로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근주 신도비
이근주(1860 - 1910)의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淸狂)이다. 1860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고, 이후 독학으로 학문을 일궜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김복한 등 홍주의병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에는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지 울분을 이기지 못해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이 생겼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9월 23일 자결하였다. 이근주는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뜻의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라는 여덟 글자를 유언으로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권원호 묘
권원호(1904 - 1944)는 강원도 고성(高城) 사람이다. 강원도 회양감리교회(淮陽監理敎會)의 전도사로 있을 때 일제의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주일예배 시간에 완강히 거부했다가 1941년 10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2년 1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옥중에서도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동방요배 등을 반대하다가 소위 불경죄(不敬罪)가 추가되었다. 1943년 11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 형이 가형(加刑)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설 집(하허당)
이설(1850-1906)의 자는 순명(舜命), 호는 복암(復菴)이며,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 김복한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3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곧이어 을사오적 주살(誅殺)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국권을 잃음에 통분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 지 수십 일 만에 1906년 4월 29일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설 묘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 김복한(金福漢)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3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곧이어 을사오적 주살(誅殺)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국권을 잃음에 통분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 지 수십 일 만에 1906년 4월 29일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범식, 홍명희 집
홍범식(1871 - 1910)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며,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참판(參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홍범식이 장남 홍명희 등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는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는 내용이 담겼고 부친의 유언을 모든 집안 자제들이 좌우명으로 삼다고 전해진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명희(1888-1968)의 호는 가인(可人), 벽초(碧初)이고, 경술국치 이후 오산학교(五山學校)·휘문학교(徽文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30년에는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나, 월북하여 요직을 거쳤다. 홍범식 고택은 경술국치에 자결 순국한 홍범식의 고택인 동시에, 사랑채는 1919년 괴산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고 전하는 3.1만세운동 유적이다. 또한 홍범식의 아들인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고택으로도 알려져있다.
홍명희 집
홍명희(1888-1968)의 호는 가인(可人), 벽초(碧初)이고, 홍범식과는 부자지간이다. 홍명희는 경술국치 이후 오산학교(五山學校)·휘문학교(徽文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30년에는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나, 월북하여 요직을 거쳤다. 충북 괴산에 위치한 홍명희 생가지 표지석이다. 홍명희가 태어난 곳은 홍범식 고택인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이지만,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후 이사하여 살았던 곳은 이 사적의 주소인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365]이다.
홍범식 묘
홍범식(1871 - 1910)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며,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참판(參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홍범식이 장남 등 가족에게 남긴 유서 10여 통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요지는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