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오강표 유허비
오강표(1843 - 1910)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범식 순절지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순 비
송병순(1839 - 1912)의 호는 심석재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동생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그 후 1912년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순 묘
송병순(1839 - 1912)의 호는 심석재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동생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그 후 1912년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강표 순절비
오강표(1843 - 1910)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임 묘(송병선의 종)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 파기 및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겨놓고 음독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 선생의 비복이자 계집종이었던 공임(恭任)도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1906년 칼로 목을 베어 함께 자결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특별한 사연을 기리기 위해 의비 공임의 묘를 송병선의 묘 옆에 작게 조성하였다. 송병선(1836 - 1905)는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고종은 송병선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윤이병 사적비
윤이병(1855-1922)은 충청남도 논산(論山) 사람이다. 1895년 영선사주사(營繕司主事)로 있을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다. 또한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고 정부 내의 친일세력을 숙청하려다 실패했다. 1903년 5월에는 청국(淸國) 동순태(同順泰)의 상표(商票)와 일본제일은행권(日本第一銀行卷)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의 위협으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을 때는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1906년에는 향리에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 밀사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의 차관통치를 시작하려고 하자 동우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연합하여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을사오적 처단과 이완용(李完用) 집에 방화를 제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3년간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1913년 9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중 1914년 4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3월 상순에 한남주(韓南珠) 등과 13도 대표로 국민대회(國民大會)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선전하는 데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 사망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윤이병 묘
윤이병(1855-1922)은 충청남도 논산(論山) 사람이다. 1895년 영선사주사(營繕司主事)로 있을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다. 또한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고 정부 내의 친일세력을 숙청하려다 실패했다. 1903년 5월에는 청국(淸國) 동순태(同順泰)의 상표(商票)와 일본제일은행권(日本第一銀行卷)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의 위협으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을 때는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1906년에는 향리에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 밀사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의 차관통치를 시작하려고 하자 동우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연합하여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을사오적 처단과 이완용(李完用) 집에 방화를 제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3년간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1913년 9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중 1914년 4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3월 상순에 한남주(韓南珠) 등과 13도 대표로 국민대회(國民大會)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선전하는 데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 사망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학순 추모비
이학순(1843-1910) 추모비는 전주이씨 익안대군의 6대손 인의공파를 모신 효사재에 위치하였다. 후손에 따르면 이학순 선생은 충남 공주 대장리(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태어나셨는데, 송상도의 '기려수필'을 근거로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가 작성되다 보니 출생지가 완산 출신으로 잘 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이학순은 성품이 청렴하고 활달하였으며, 실천에 힘썼던 선비였다. 이학순은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방의의 17대손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병합하려고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으로 하여금 데라우치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민족적 저항을 염려하여 공포하지 않다가 1주일이 지난 후인 1910년 8월 29일에야 공포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후 모든 정책을 동원하여 한민족의 민족적 저항을 제압하려는 술책을 강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을 지급하여 회유하려는 시도였다. 일제가 은사금을 보내어 받도록 온갖 협박을 함에도 이학순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은사금 수령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일제는 무단 식민통지의 상징인 헌병대를 투입하여 이학순을 투옥하고 고문까지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은 고초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잠시 자유로운 몸이 된 이학순은 1910년 12월 7일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은 끊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충곡서원(이학순 배향)
이학순(1843-1910) 추모비는 전주이씨 익안대군의 6대손 인의공파를 모신 효사재에 위치하였다. 후손에 따르면 이학순 선생은 충남 공주 대장리(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태어나셨는데, 송상도의 '기려수필'을 근거로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가 작성되다 보니 출생지가 완산 출신으로 잘 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이학순은 성품이 청렴하고 활달하였으며, 실천에 힘썼던 선비였다. 이학순은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방의의 17대손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병합하려고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으로 하여금 데라우치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민족적 저항을 염려하여 공포하지 않다가 1주일이 지난 후인 1910년 8월 29일에야 공포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후 모든 정책을 동원하여 한민족의 민족적 저항을 제압하려는 술책을 강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을 지급하여 회유하려는 시도였다. 일제가 은사금을 보내어 받도록 온갖 협박을 함에도 이학순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은사금 수령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일제는 무단 식민통지의 상징인 헌병대를 투입하여 이학순을 투옥하고 고문까지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은 고초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잠시 자유로운 몸이 된 이학순은 1910년 12월 7일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은 끊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서재필 집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광제 사적지
김광제(1866-1920)는 충청남도 보령 사람으로, 1907년 1월 대구에서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 등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큰 호응을 모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대한자강회 강제 해방 후, 독립투사이며 언론인인 신채호, 장지연, 남궁억,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몽지 대한협회 회원으로서 구국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에 3.1운동 일주년을 맞이하여 유학생들과 함께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국내 및 동경의 한국인에게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사전에 일제 경찰에 발견되어 체포되었으며, 일인이 독살하였다는 풍설이 있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