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진, 고예진 추모비
고순진(1863 - 1938)의 자는 의경, 호는 만취이며,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고순진은 일찍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생 고예진(高禮鎭)에게 격문 2백여 매를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게 하였다. 또한 최익현 의진(義陣)에 조총을 제공하고 군자금을 내놓는 등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3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한국 유림들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2,674자의 장문으로 된 청원서에 한국 유림 대표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金昌淑)이 상해(上海)에 전달하여 당시 한국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1875 - 1952)의 자는 수문, 호는 송천이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의군부 총무국 서기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형제인 고용진(高龍鎭)·고석진(高石鎭)이 최익현(崔益鉉)과 거사할 것을 계획하자 거기에 가담하였다. 1906년 4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개최하고, 호서·호남 일대의 유생과 포수들을 규합하여 면암 최익현이 이끄는 의진이 구성되자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의진이 순창에 이르렀을 때 관군에 포위되어 싸우려고 하였으나, 최익현이 민족끼리 더 이상 골육상잔할 수 없음을 선언, 항전을 금지하였다. 그 때 체포되어 전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914년 고종의 명으로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국서기관이 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장서(長書)에 서명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