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당기념관
백당기념관은 신태윤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으로 곡성 단군전 안에 있다. 단군전은 단군왕검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16년 신태윤이 학정리 삼인동에 세웠던 것을 1931년 봉황대로 옮겨 중건하였다. 백당 기념관은 단군전 경내에 신태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신축한 삼칸 팔자 지붕의 한옥에는 백당의 옥중 저서인 우리나라 역사인정사, 도해삼일신고, 고려사절요, 대한사략운기 등 저서와 단군에 관련된 서적, 대한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도서, 백당선생 관련 신문 기사와 사진 및 도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주요 소장 도서들과 곡성 3.1운동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곡성군의 애국지사 23인, 호남의 양한묵 선생을 비롯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독립기념관에 의뢰해 자료를 제공받아 게시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 곡성읍(谷城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곡성 공립보통학교의 부훈도(副訓導)로 신·구(新舊) 학문을 널리 배웠으며, 또한 민족정신이 남달라 강하여 담양·장성(長城)에서 재직할 때는 훈도들의 복장인 금테모자에 칼을 차는 일본식 복장을 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한복인 행전 매고 짚신을 신고 다녀 일본인의 미움과 감시를 받아왔다.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1919년 3월 중순, 곡성지방에는 아직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때에 보통학교 숙직실 뒤의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끓여먹고 있던 정래성(丁來聖)·김중호(金仲浩)·양성만(梁成滿)·박수창(朴秀昌)·김기섭(金基燮)·김태수(金泰洙) 등 청소년을 불러놓고, 각지에서 일어나고 잇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해주고, 곡성에서도 빨리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 청년들이 이에 찬성하자, 3월 26일 정래성의 집에 모이도록 하여 시위운동에 필요한 태극기와 격문(檄文)을 작성케 하는 등, 사전준비를 갖추게 하였으며, 곡성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김중호에게 『조선역사』책을 주고 거사 당일의 성공을 위하여 동료 훈도 및 마을 유지들에게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역설하였다. 예정일인 3월 29일 보통학교 3·4년생과 동리 청년들 수십명이 장터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안을 시위행진하다가 일제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