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중앙총부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는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3.1운동 계획을 논의한 곳으로 천도교 측의 유력한 거사추진 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곳이다.
최린 자서전에 따르면 민족대표의 선정을 비롯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 거사준비는 손병희의 지도 아래 권동진, 오세창, 최린 3인이 수시로 회합하여 추진했다고 하는데, 그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가 경성부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였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의 지도 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와 만세 시위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불교계와 제휴를 추진하였다. 즉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계의 3.1운동 통합논의에서 중심 장소였던 것이다.
손병희(1861~1922)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원 출신이며, 천도교인이다. 1882년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설하고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18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한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가운데,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였고,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위에 놓고 회람케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