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석 묘
정몽석(1896-1961)은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4월 16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508번지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계통인 진주 광림학교[현 봉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신학문을 배웠다. 1919년 2월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여하러 상경하였다가 3·1 운동을 직접 목도하고,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지니고 진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정몽석은 강달영(姜達永)·김재화(金在華)·박진환(朴進煥)·이강우(李康雨)·최웅림(崔雄林) 등 동지들과 함께 진주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1919년 3월 10일 새벽 시내 곳곳에 격문을 부착하였다. 그리고 광림학교 졸업생과 기독교·사회 단체 등과 교섭하여 진주 전역에 동시 다발로 봉기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태극기와 선전문 3천 장을 등사하였다. 3월 18일 진주 장날 정오, 봉래동 진주교회의 종소리와 비봉산(飛鳳山)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진주 3·1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1만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일주하였다. 정몽석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격문을 배포하였다. 진주경찰서와 소방대가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 300여 명을 검거하였으나, 3월 23일까지 크고 작은 시위는 20여 차례 계속 이어졌다. 정몽석은 태극기 제작, 격문 배포, 주민 선동, 「독립선언문」 낭독, 시위 주도 등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진주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법적 투쟁을 위해 항소했으나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9월 6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진주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2월 출옥 후 최웅림과 함께 대한적십자사 진주지사에 근무하면서, 1921년 7월 진주시 지수면 갑부 허만정(許萬正)을 찾아가 군자금을 청탁하다가 체포되었다.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3년 4월 15일, 진주청년회관에서 강상호(姜相鎬)·장지필(張志弼) 등과 백정 해방 운동인 형평사(衡平社) 발기인으로 동참하여 신분제 타파에 앞장섰다. 1924년부터는 의열단원 최웅림을 위해 군자금과 도피처를 계속 제공해 온 것으로 전한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 진주 주재 기자로 활약하였다. 1961년 8월 16일 작고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