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의윤 묘
권의윤(1868 - 1942)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24일 경상도지방 독립만세운동의 연락 책임자이던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에 내려와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과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을 통하여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당시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교사인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이만집·김태련·김영서·이상백·백남채·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 등과 함께 만나 서문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각자 주민과 학생의 동원을 분담하였는데, 그는 계성중학교 학생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한편 독립만세운동계획을 전해들은 대구고보(大邱高普)에서도 허 범(許範)·백기만(白基萬)등의 학생이 주동하여 계성중학교 학생들과 합동하기로 약속하였으며, 대구에서의 거사계획을 듣고 대구로 내려온 김무생(金武生)·박제원(朴齊元)이 서울과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서의 여자들의 활약상을 전하고, 대구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학생들도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성경학교(聖經學校)와도 연락을 취하여 연합시위를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3월 6일에는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김태련이 자기 집에서 이를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기(旗)와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매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가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3월 3일에는 홍주일(洪宙一)이, 3월 7일에는 백남채가 일제에게 예비 검속되어 주동인물들을 긴장시켰으나, 거사 계획은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이어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그는 오후 3시경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그가 계속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앞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를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 6정을 설치해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대열 안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여 현장에서 수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그는 포위망을 뚫고 피신하여 옥고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각지를 전전하며 피신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