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 기념관
최흥종(1880-1966)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목사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오방(五放),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이다. 1907년 세례를 받고 ‘흥종(興宗)’으로 개명하였다. 최흥종은 1904~1905년 사이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김윤수(金允洙)와 함께 양림리교회(楊林里敎會)를 중심으로 광주지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순검(巡檢)이 되었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병기(徐丙冀)와 함께 대동의상회(大同義償會)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순검으로 있으면서 일경에 체포된 광주·전남지역 의병들을 몰래 풀어주거나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19년 3월 2월 김필수(金弼秀)·김철(金鐵)과 함께 서울에서 김범수(金範洙)를 만나 광주지역 만세시위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어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을 나눠주며 연설하였다. 이어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1920년 6월 출옥하여 8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 의사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밖교회(지금의 광주 중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다. 시베리아선교를 시도하였다가 좌절된 후 1923년 광주소작인연합회(光州小作人聯合會)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4년 광주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광산회 총무(1923), 서선수해구제회 집행위원장(1923), 광주 금정교회 목사(1924~1925), 광주수해구제회 위원(1925), 광주여고보창립 기성위원(1926), 광주협회 위원(1926)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 선교에 나섰으나 소련 당국의 탄압을 받아 일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4월 귀국하였다. 이어 10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어 민족운동을 재개하였고,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1927), 광주교육보급회 이사(1928), 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1928),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1928) 등을 역임하였다. 1929년 7월 제주도 모슬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1931년 7월 사직하고 이후 조선나병환자구제회(朝鮮癩病患者救濟會)를 창립하면서 구라사업(救癩事業)과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하였다. 1937년 1월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칩거하며 병자·빈민들과 함께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고, 8월 17일 전남건국준비위원회(全南建國準備委員會)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 호남신문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1964년 12월 「유언장」을 작성하고,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한 후 5월 14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최흥종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