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섭 묘
홍기섭(1873-1919)의 자는 학삼, 호는 우송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며 공론 환기를 위해 노력했고,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책을 논의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송규선(宋圭善), 송우선(宋祐善), 송회근(宋晦根), 김창렬(金昌烈)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전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각 동리로 배부하는 거사 준비를 하였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28일 장날에 선남면 선원동[현 선원리]의 이현기(李玄琪) 등이 먼저 시작했으나, 가장 큰 만세 시위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추진한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였다. 홍기섭은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읍 장터에서 이기정(李基定), 이기현, 송인집(宋寅輯), 송회근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며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하였다. 주도 인물들은 즉각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분노한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경의 발포로 홍기섭과 이태희(李兌凞)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