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
1919년 3월 12일 인동 진평동 3.12독립만세운동은 일제치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개성학교 학생의거를 시발로 의성비안과 인동진평동, 김천, 포항을 거쳐 안동과 경주 등지로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당시 경북 중서부 지역에서는 3월 12일과 이틀뒤인 14일 인동에서 만세운동이, 4월 3일 해평, 4월 8일 임은동, 4월 12일 선산장터 등지에서 연속해 시위가 일어나 도내의 만세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인동 3.12독립만세운동의 발단은 인동 진평동 출신의 이내성, 이범성, 이상백 등이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침략에 한일합병이 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거사가 진행된 것이다.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 뒤 3월 7일 대구 계성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영식이 등사판으로 등사된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동지인 이내성 애국지사와 함께 진평동 유지 이상백을 찾았으며, 이범성 등과 함께 거사를 논의했고 이어서 같은 동리의 이영래, 임점석, 임용섭, 박명언, 권영해 등과 상의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냈다. 3월 12일로 거사 날짜를 결정한 이들은 독립선언서 등사본과 태극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거사 당일 박영언 등은 동리의 각 호를 방문해 오후 8시 현재 인동3.12독립운동만세 기념탑이 위치한 진평동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통해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해 궐기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상백과 이영식은 교대로 만세바위 위에 올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이를 앞당기기 위해 힘차게 만세를 통한 시위운동을 전개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력히 호소하며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인동 3.12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일제 군경들은 주동 인물 8명을 체포했고 만세시위대는 강제로 해산당했다. 1차 만세 사건으로 항일 저항의식이 고취됐으며 이틀 뒤, 대구 계성학교 학생 김도길은 다시 진평동으로 들어와 청년 유지 박봉술과 김성윤을 만나 의거를 다시 논의했으며 일제 군경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3월 14일 오후 9시경 뒷산 만세바위를 중심으로 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