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발상지 기념비
이곳은 진주와 서부경남 3.1운동 발상지, 의논장소이자 순국지사 김재화 생장지이기도 하다. 김재화, 조응래, 심두섭, 박대업, 정용길 등은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갔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감화를 받고 진주로 귀향했다. 이들이 품에 안고 온 것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이들은 김재화의 집인 집현면 하촌리(지금의 진주시 하촌동 하촌마을) 등에서 진주에서도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시기와 구체적인 거사 방법을 논의했다. 서울에서 격문을 가져왔으나 ‘교유문’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작성하고 구성해 수천장을 인쇄해 군중에게 살포했다. 교유문의 작성은 김재화가 맡았으며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의 인쇄는 천전리(천전동) 망경산에서 했다. 인쇄자는 심두섭, 박진환, 정준교 등 3명이었다. 김재화, 심두섭, 조응래, 이강우, 강상호, 강달영, 박진환, 정준교, 장덕익, 권채근, 한규상 등 애국청년들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천 장을 각 단체와 개인에게 배포했다. 마침내 3월 18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진주시내에 들어온 사람들은 옥봉동·평거동·천전리 등에서 시장으로 모여들었으며, 재판소 앞에서는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강우가 연단에 등장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4시경 시위대가 도청 앞에 모였을 때 군중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날 이병홍, 강재순 등으로부터 촉발돼 봉기한 정촌면 5000여명의 군중도 합세하기 위해 진주읍을 향해 돌진했다. 진주 3·1운동의 주체 세력은 어느 특정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농민·학생 등 각계각층이 골고루 참여하였다는데 의의가 크다. 전국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노동독립대·걸인독립대·기생독립단 등의 시위도 있었다. 위와 같은 인물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본 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