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룡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본 비는 1919년 4월 4일 단장면 표충사 스님 및 표충학원 학생들이 주도하고 수천 명의 민중이 만세 시위를 전개한 것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1919년 2월 말경 범어사의 승려 대표 7명은 한용운의 지시로 상경하여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귀향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20일, 통도사 승려 50명이 밀양군 단장면 표충사로 와서 그곳 승려들과 비밀회합을 갖고 만세 시위를 협의하였다. 이들은 거사 일을 4월 4일 태룡리 장날로 정하였다.드디어 4월 4일 태극기를 가지고 온 장석준 등을 비롯한 표충학원 학생들은 재빨리 이를 승려들과 모여드는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오 경에 5,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12시 30분 이장옥, 이찰수, 오학성, 손영식, 김기봉(김성흡), 구연운, 오응석 등 표충사 승려들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높이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그곳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는 군중들의 투석으로 유리창, 지붕, 벽 등이 파괴되었다. 이에 밀양 헌병분견대로부터 일본군 헌병이 급파되어 이들의 발포로 오후 1시 30분 군중들은 해산하였다.무자비한 일본군 헌병의 탄압은 군중들의 의분을 높여 다음 날 오후 2시까지 철통같은 일본 군경의 경계 속에서도 군중들은 수차례에 걸쳐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응원부대의 도착으로 시위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결국 이날의 만세 시위로 364명이 검거되고 그 가운데 71명이 재판을 받은 끝에 이장옥은 징역 5년, 오학성, 손영식은 징역 3년, 이찰수, 김성흡은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위와 같이 표충사 및 표충학원 학생들을 비롯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고자 2005년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