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평계리출신 독립유공자 공적자랑비
수묵.평계리출신 독립유공자 공적자랑비는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평계리에 위치해있다. 기존 허상구 선생의 공적비가 있던 자리인 이곳에 수묵·평계리 출신 3.1운동 독립유공자 9명(김용이, 육창주, 이면호, 허상기, 공재익, 허간, 허상구, 허상회, 허찬)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자랑 비 1기를 신규 설치했다. 수묵·평계리는 이원면에서 가장 많은 3.1운동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이 공적자랑 비는 이원면의 역사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웠다. 또 이원면 수묵리와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 등 곳곳에 흩어져 있던 허상기·허상회·허간·허찬 선생의 공적비 4기를 옮겨 설치했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3월 15일 옥천사람 육창주(陸昌柱)와 허상기 등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헌병에게 제지당하면 모두 주재소로 몰려가서 항의하고, 만일 구금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이들을 탈출시키기로 협의한 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은밀히 부락민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옥(許相玉)·허 찬(許贊) 등의 동지를 이끌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허상기·육창주·김용이가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시위군중 2,3백명이 투석으로 주재소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이에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을 안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되었으나, 금산(錦山)에서 온 이경만(李景滿)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오후 3시경 일시 해산된 시위군중들이 주재소 앞에서 다시 모여 유리창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고, 몽둥이로 일본 헌병들의 말(馬)을 후려치자, 다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하여 시위군중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때 이원 장터에는 옥천과 대전(大田)에서 일군 수비대원이 증파되었으며, 일본 헌병도 1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