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만세운동유적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괴산군이 세운 기념비이다. 1985년 9월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소수면의 독립만세운동은 몽촌리의 유해륜(柳海崙)과 경권중(慶權重), 송능식(宋能植) 등이 주도하였다.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유해륜과 경권중은 같은 군의 괴산면·장연면·청천면 등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고무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경, 송능식이 앞장선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현리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하여 몰려갔으나, 사전에 탐지한 일제 경찰의 무력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날 밤 8시 경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유해륜(1883 - 1956)은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沼壽面 夢村里)에 거주하였으며 이곳 유지로서 경권중(慶權重)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일 면민 200여 명을 규합하여 소수면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김승환(金昇煥) 면장의 집과 소수면 주재소로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시위군중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으며,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권중(1871 - 1920)은 1919년 4월 2일 유해륜(柳海崙)과 함께 소수면(沼壽面)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과 경찰주재소를 찾아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함께 독립운동하자고 말하고, 다시 동리민 200여명을 이끌고 면장집과 주재소에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새벽 2시경 면사무소 습격계획이 일제의 제지로 실패하자, 약 300여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밤 8시경 면장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귀가 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능식(1898 - 1963)은 1919년 4월 2일 괴산군 소수면(沼壽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유해륜(柳海崙)·경권중(慶權重) 유지 등이 괴산군내의 괴산면·장연면(長延面)·청천면(靑川面) 등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고무되어 추진되었다.4월 2일 새벽 2시 경, 괴산군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는 송능식의 주도로 시위군중 50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옥현리(沃峴里)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그런데 사전에 이러한 정보가 새어나가 일경의 무력적 저지로 일단 중지되었다. 이날 밤 8시 경, 시위군중 300여 명은 다시 집결하여 면장집을 습격하고 각 동리를 돌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그날 밤부터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여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송능식은 이 일로 붙잡혀,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