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사적지
유관순(1902-192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이다.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 연기, 청주 등지의 교회 및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전 9시,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내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 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일본 헌병에 의해 최초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조인원의 설득으로 잠잠해졌다. 오후 2시경 파견된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결국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하였으나 최종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 박인덕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