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적거터
남강 이승훈(1864 ~ 1930)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다. 1907(광무 11)년 평양에서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건립하는 한편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 정신으로 교육에 힘쓰다,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해 9월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와 경성에서 4년 2개월 여 간 수감되었다. 1915년 가출옥 후 세례를 받은 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초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이 송진우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을 결의하고 선언서 및 의견, 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하며 사회 주요 인사를 포섭하려 하였는데 이 때 최남선은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을 지니고 안면이 있던 이승훈을 포섭하기로 하였다. 2월 11일 최남선은 이승훈을 상경하게 하였고 일본 헌병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김성수의 집에서 송진우와 만나게 하였다. 기독교 측의 독립선언 참가 요청을 승낙한 이승훈은 독립운동 계획의 취지를 기독계 인사들에게 설명, 동지를 규합했으며 천도교 측과도 접촉하였다. 이후 천도교 측의 주장에 따라 독립청원의 제출이 아닌, 독립 선언을 하기로 결의하고 운동 전개를 계획, 기독교 측 대표로써 활동하게 된다.고종 황제의 국장 직전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결의하고, 2월 27일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의견 청원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28일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확정하면서 선언 장소를 인사동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출감하였다. 출옥 직후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를 정비한 후, 1924년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장에 취임했다가 5개월여 만에 사임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오산학교의 경영에 힘쓰다가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케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진력하였다. 해당 사적은 이승훈 선생이 1911년 5월 피체 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당시 적거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남강은 이곳에 적거하는 동안 매일 교회에서 강설하는 한편 제주인들에게 교육과 개화운동이 일어나야 산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