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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7,824

인물정보

성명
박인호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인물정보

성명
박인호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박덕칠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이창욱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관작리 전적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열망했던 동한농민군과 진압군 사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인물정보

성명
박응하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관작리 전적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열망했던 동한농민군과 진압군 사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인물정보

성명
홍면옥
한자명
洪冕玉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84~? ~ ?
본적
경기도 수원
포상훈격
해당없음
포상년도
해당없음년

공적개요

1884년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현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홍면(洪冕)이라고도 불렸다. 1914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횡령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1917년 12월에는 인천지청에서 도박죄로 태형 30도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홍면옥은 1919년 3월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발표 소식을 듣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송산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홍면옥은 그와 뜻을 같이 한 왕광연(王光演)·홍명선(洪明善)·홍태근(洪泰根)·홍준옥(洪㻐玉)·차경현(車敬炫)·김교창(金敎昌) 등과 함께 1919년 3월 25일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3월 28일 오후 2시 경에는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모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당시 치안 방해를 이유로 출동한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에게 체포되어, 체포 과정에서 노구치 고조가 권총을 발사하여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홍면옥의 총상으로 분노한 군중은 노구치 고조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그를 처단하였다. 홍면옥은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살인 교사 혐의로 징역 15년을 판결받았으나, 1920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일부 취소 판결을 받아 징역 12년이 확정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의 은사(恩赦)와 1927년의 대사령(大赦令) 등으로 징역 8년 10월로 감형되어, 1927년 12월 23일 만기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송산면 육일리에 대교서당을 열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아들 홍진후의 증언에 의하면, 홍면옥은 대교서당에서 태극기를 그리는 법과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송산면 치안대장을 맡았으며,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수원군에서는 수원군인민위원회가 수원군청을 접수하고 자치적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수원극장에서 인민위원회 대표회의가 개최되어 수원군 각 읍면 대표 1,50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홍면옥은 이하영, 박지명, 박승극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부에 선임되었다. 1946년 민족주의민족전선[民戰]이 결성되면서 인민위원회는 이에 수렴되는 형태를 취하였다. 1946년 2월 26일 민족주의민족전선 경기도위원회 결성대회가 열렸으며, 홍면옥은 상임위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행적으로는 1946년 3월 이하영과 함께 수원군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주석단에 앉은 사실이 확인된다. 1946년 11월 5일 홍면옥이 검거된 사실을 알리는 기사에 의하면, 홍면옥은 민족주의민족전선 경기도위원회 의장뿐만 아니라, 송산면 인민위원회장을 맡은 것이 확인된다. 1948년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도 홍면옥의 이름이 확인되어 월북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행적이나 사망과 관련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인물정보

성명
서인수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서인주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조병갑
한자명
趙秉甲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44.5.15 ~ 1911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1892년(고종 29) 4월 고부군수가 되었다. 1893년 흉년이 들자 농민들에게 강제로 세를 징수하는데, 부유한 농민을 잡아들여 갖가지 죄명을 씌워 2만여 냥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태인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000여 냥을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고부군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탐학행위는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것이었다. 즉,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구보(舊洑) 밑에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추수기에 수세(水稅)를 거둬들여 700여 섬을 착복하였다. 이에 농민들이 1893년 12월 전봉준(全琫準)을 앞세워 억울한 사정을 진정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4년 2월 농민들이 동학접주 전봉준을 영도자로 추대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전주로 도망가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사태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고부민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여러 탐학행위가 밝혀져 귀양을 갔다. 조병갑의 탐학행위에 항거하여 일어난 고부민란은 전국적인 동학농민봉기로 확대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인물정보

성명
문장로
한자명
文章魯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46.??.?? ~ 1919.09.??
본적
충청남도 예산
포상훈격
해당없음
포상년도
해당없음년

공적개요

문장로는 북접 내포 지역 동학농민운동의 횃불을 밝혔던 방갈리 기포의 주역이었으며, 예산에 동학을 뿌리내리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였다. 1893년 2월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서 상암 박희인을 통해 같은 동네에 살던 조운삼, 아들 문구석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였다. 적극적인 포덕 활동을 펼쳐 방갈리 접주가 되었고, 기포령(起包令)에 의해 태안 관아에 구속되어 있던 동학 지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태안 관아를 습격하여 30여 명을 구출하였다. 문장로는 면천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 홍주성 전투에 태안 지역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으며, 1894년 10월 29일 홍주성 전투 패배 후 고향인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 당도하여 농민군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관군의 체포령이 내려져 전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태안반도 일대 해안 토굴과 야산에 은신하였다. 계속되는 은신 생활 속에 추격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자 아들인 문구석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진해서 체포되어 1894년 11월 16일 태안에서 총살당하였다. 아들의 사망 이후 문장로는 1895년 태안군 이원면 만대정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을 피신시킨 쥐 소원면 소근리 철마산 산중에 토굴을 파고 8년 동안 은신하며 동학 조직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0년 동학 지도부들이 내린 조직 강화 밀명을 받고 태안 수접주가 되어, 조석헌·곽기풍·이광우 등과 함께 비밀리에 조직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1902년 1월 공주부의 이민직이 체포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색출 작전을 시작하자 문장로는 가족들과 함께 목선을 타고 안면도와 원산도를 거쳐 2월 9일 광천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홍성군 홍동면 화신리에 거주하던 김명수(金明洙)의 안내로 산중에 토굴 움막을 지어 은거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였다. 이후 신분이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1904년 2월 공주시 사곡면 연진동의 산중으로 피신하여 숯장수로 변신하고 토굴에 은거하였다. 문장로는 1910년 경술국치로 동학 관련자들에 대한 탄압이 느슨해지자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로 이거하여 불모지를 개간하고 천도교 포덕 활동을 하다가 1919년 9월 사망하였다.

문장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문병석
한자명
文秉錫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92.??.?? ~ 1970.??.??
본적
충청남도 예산
포상훈격
해당없음
포상년도
해당없음년

공적개요

성암(成菴)문병석은 예산 지역의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신간회 예산지회를 창립하여 진보적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아버지는 동학 수접주 낙암(樂菴) 문장로(文章魯)이고, 형은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관군에게 총살된 문구석(文龜錫)이다. 문병석은 1892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문장로가 동학농민운동의 주모자로 수배되면서 산간벽지로 은신 생활을 하게 되었고, 1900년경이 되어서야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오랜 은신생활로 정규 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문병석은 천도교 구파의 지역 책임자로 4월 3일 예산 신례원 장날에 군중 500여 명을 규합해 예산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마기상과 함께 일본군에게 붙잡혀 예산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한쪽 귀를 잃는 상해를 입었다. 그 후 1921년부터는 천도교 예산교구 금융원 직책을 맡아 예산 지역 민족운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고, 교구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1925년에는 예산 종리원 주임 종리사를 역임하였다. 문병석은 1926년 순종황제 인산일에 예산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같은 해 천도교 중앙종리원에서 천도교 구파의 청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청년동맹을 결성하자 마기상·정규희 등과 함께 천도교청년동맹 예산지부를 결성하였다. 1927년 11월 14일 일제강점기 항일 사회운동 단체로 가장 규모가 컸던 신간회 예산지회를 창립하여 정치문화분과에서 예산 지역 진보적 민족운동의 중추적인 활동을 진행하였다. 또한 1931년 4월 26일 조선농민사 예산군 지부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문병석은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 기도 운동을 펼치다 1938년 신천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는데, 1970년 사망할 때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문병석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문구석
한자명
文龜錫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모름 ~ 모름
본적
충청남도 예산
포상훈격
해당없음
포상년도
해당없음년

공적개요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아버지는 동학 수접주 낙암(樂菴) 문장로(文章魯)이고, 형제는 문병석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관군에게 총살되었다.

문구석의 발자취

성명 한자명 생몰년도 운동계열 포상훈격 생존여부 본적 보기

성명

박인호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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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인호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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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덕칠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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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창욱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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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응하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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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홍면옥

한자명

洪冕玉

생몰년도

1884~? ~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해당없음해당없음

생존여부

사망

본적

경기도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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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서인수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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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서인주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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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조병갑

한자명

趙秉甲

생몰년도

1844.5.15 ~ 1911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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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문장로

한자명

文章魯

생몰년도

1846.??.?? ~ 1919.09.??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해당없음해당없음

생존여부

사망

본적

충청남도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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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문병석

한자명

文秉錫

생몰년도

1892.??.?? ~ 1970.??.??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해당없음해당없음

생존여부

사망

본적

충청남도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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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문구석

한자명

文龜錫

생몰년도

모름 ~ 모름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해당없음해당없음

생존여부

사망

본적

충청남도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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