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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7,824

인물정보

성명
장경삼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장옥삼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장공삼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장경광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66 ~ 1922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장경광의 본명은 상호, 호는 경암이다. 장경광은 29세인 1894년 4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세운 함평집강소(혁명사령부) 서기(책임비서)를 맡아 혁명과업을 수행했고, 반제 반봉건 반부태의 혁명정신이 깃든 "大同世上"을 선언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차 봉기 때 제폭구민, 보국안민, 척양척왜 사상을 선무하며 활약하다가 그해 12월, 일본군까지 연합한 무력진압 때 현상 수배됐다.

장경광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한달문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한달문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인배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70 ~ 1894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김인배는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동학의 최고 지도자를 가리키는 영호대접주란 직책을 맡았다. 그가 중심이 된 영호도회소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유일하게 다른 지역과 연대한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벌인 사례로 동학농민혁명에 기록되고 있다. 김인배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영호남 연합군이 순천에 본영을 두고 인근 광양현과 낙안군, 좌수영 지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하동과 진주 등 서부경남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인물정보

성명
김덕명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박봉양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 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인물정보

성명
김시풍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미상 ~ 1894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김시풍은 개항기 전주감영영장을 역임한 무신이다. 전라북도 전주 출신. 전주감영(全州監營)의 장교로 일찍이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60세 가량의 기골이 장대한 노인으로 전주감영의 영장(營將)으로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막아 내라는 임무를 띠고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된 홍계훈(洪啓薰)이 5월 11일 전주성에 입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승승장구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관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과 의논, 전주성 내에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사람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전주감영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 등과 같이 체포되었다. 같은 달 15일 목이 잘려, 16일 아침 역시 같은 혐의로 목이 잘린 김영배(金永培)·김용하(金用夏)·김동근(金東根)과 함께 전주 남문(南門) 밖 장터에 효수되었다.

김시풍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기병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31 ~ 1831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김기병은 부안(부령)김씨 김두회의 차남으로 1831년 1월 21일 부안군 상서면 내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의지가 강직하면서도 우국충정이 충만한 인격으로 성장하였고 결혼 후 미개발된 상선마을에 이주하여, 광범위한 농지개발로 크게 번창하여 부안 군내의 유수한 농사 재벌이 되었다. 당시는 조선 말 개화기로 외세의 침략과 수탈이 극심하였고 누적된 부정부패,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국가 사회의 비극상에 비분강개하던 김기병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보국안민" 등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하자 결연히 동참하여 부안 기포 두목이 된 후 정열적으로 의기투합한 농민들을 설득 취합하여 부안농민혁명군을 조직하고 부안 변산 해창에 있었던 국방용 무기고를 접수하여 농민군을 무장시킨 후 우덕동에서 무기 사용법을 훈련시켜 주민들로부터 환호와 경탄을 받았다. 1894년 4월 1일 부안군 하서면에서 500여명의 농민군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지휘하며 부안성을 무혈 함락하고 백산성 총집결에 참여 전봉준 장군과 합세한 후 4월 7일 황토현 전투, 4월 27일 전주성 함락, 10월 21일 우금치 전투 등 모든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과 함께 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은 관군의 체포와 총살대상이 되었으나 김기병과 생존한 부하 동학군은 굴하지 않고 부안에 잠입, 지하농민혁명 운동을 계속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향년 65세로 처형되었다.

김기병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송두호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최경선
한자명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59 ~ 1895
본적
포상훈격
포상년도

공적개요

최경선은 동학농민혁명 5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이다.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에 참여하였다. 1894년 정월 전봉준(全琫準)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고부민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동학교도 300명을 집에 집결시켰다가 고부농민 1,000여 명과 합세해 고부관아를 습격했던 것이다. 같은 해 3월 제1차 농민봉기 백산(白山)에서 농민군을 조직할 때, 영솔장(領率將)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서남해안을 돌아 5월 6일 전주성에 입성할 때까지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한편, 5월 7일의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던 시기에는 전봉준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돌며 집강소 설치를 감독하였다. 7월에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3,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의 동학접주 오권선(吳權善)의 군대와 합세하여 총공격을 단행했으나 집강소 설치에는 실패하였다. 8월 13일 전봉준이 단신으로 나주성에 입성해 부사 민종렬(閔鍾烈)과 담판해 집강소 설치가 가능해지자, 나주의 집강소를 담당해 행정을 감독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이 전해진 그 해 9월에 제2차 농민군봉기가 삼례회의(參禮會議)에서 결정되었다. 전봉준을 수행, 정읍·장성·담양·동복·벽성 등지로 순행하며 농민군 봉기를 독려하는 한편, 태인에서 7,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 봉기에 참여하였다. 우금치에서의 패전 이후 12월에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수성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孫華中) 등과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한 친일개화정권의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성명 한자명 생몰년도 운동계열 포상훈격 생존여부 본적 보기

성명

장경삼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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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옥삼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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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공삼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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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경광

한자명

생몰년도

1866 ~ 1922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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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달문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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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인배

한자명

생몰년도

1870 ~ 1894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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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덕명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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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봉양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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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시풍

한자명

생몰년도

미상 ~ 1894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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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기병

한자명

생몰년도

1831 ~ 1831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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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송두호

한자명

생몰년도

~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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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최경선

한자명

생몰년도

1859 ~ 1895

운동계열

해당없음

포상훈격

생존여부

사망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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