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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관 구 묘
이재관(1920-1986)의 이명은 안본재관(安本在官)이며, 1940년 4월, 장기(長岐)에서 심재인(沈載仁) 등 5명의 동지와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맹세하였으며, 1940년 8월, 함께 동경 상야(上野)공원에 모여 다가올 조국독립에 대하여 의논하고 독립의식을 길렀으며 이후에도 계속 모임을 가졌다. 그러던 중 동지간의 연락 문서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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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익 묘
황태익(1877-1953)은 천도교인으로 1919년 3월말에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변우범(卞又範)과 태극기 수십장을 제작하였다. 4월 1일에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鎭田面日岩里)에서 변상태 등과 시위군중 1,500여명을 지휘하였으며 군중을 선도하다가 일본 수비대와 충돌하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20년 3월, 경남 진주(晋州)에서 경남결사대(慶南決死隊)를 조직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4월에는 경상남도 일대를 순시하는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고, 6월에는 일제고관을 처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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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마당-고성읍 독립만세운동의 터
객사마당은 1919년 4월 1일 고성읍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객사마당의 터에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현재는 경남 고성다문화가족지원센터 입구에 있다. 고성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2일 정오 학생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친 것으로 시작되었다. 경찰의 탄압과 주동 인물들의 검거로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이 나선 독립만세운동은 민중들을 크게 흔들었고, 민중들은 4월 1일 읍내 장날에 다시 한 번 일어섰다. 천도교도와 읍내 노동자 등 60여명이 쌀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들어가자 김진만과 문상범 등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어시장을 돌면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일제는 고성 헌병분견소만으로는 역부족으로 판단해 사천 일본군 헌병분견대와 고성 일본 재향군인까지 가세해 총검으로 이들을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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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최초 독립만세운동터 표지석
고성군 최초 독립만세운동터 표지석은 경남 고성에 있으며, 국천다리(와룡교) 옆에 있다. 국천사장은 배둔리 만세운동의 시발점이었으며, 배둔장터 독립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경 구만면 중앙부에서 울려 퍼진 나팔소리에서 시작됐다. 모두 국천사장(菊川沙場)으로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하곤 10리쯤 떨어진 배둔장터로 향했다. 그 인원은 7~800명에 가까웠으며, 많은 애국지사가 일본 헌병에 검거돼 태형을 받거나 마산 또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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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천사장 독립만세 기념비
국천사장 독립만세 기념비는 경남 고성에 있으며, 국천다리(와룡교) 옆에 있고, 바로 옆에는 국천사장 '고성군 최초 독립만세운동터' 표지석도 있다. 국천사장은 배둔리 만세운동의 시발점이었으며, 배둔장터 독립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경 구만면 중앙부에서 울려 퍼진 나팔소리에서 시작됐다. 모두 국천사장(菊川沙場)으로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하곤 10리쯤 떨어진 배둔장터로 향했다. 그 인원은 7~800명에 가까웠으며, 많은 애국지사가 일본 헌병에 검거돼 태형을 받거나 마산 또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김해제, 문태룡, 우태선, 이정수, 최낙종, 최낙희, 최정원, 허재기, 구영서, 이종홍, 최석호, 최정주, 최정철 등 수많은 구만면민들이 이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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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 묘
이정수(1899-1964)이명은 이위백(李爲白)이다. 그는 구만면과 회화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1시 경 국천사장(菊川沙場)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10리쯤 떨어진 회화면 배둔리시장으로 행진하며 전개되었다.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이정수는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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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기 집
허재기(1887-1969)는 고성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허재기(1887-1969)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최정주(崔正周)·최낙희(崔洛僖)·최정원(崔正元)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3월 30일 오후 1시경, 나팔소리를 신호로 개천리(介川里)·마암리(馬岩里)주민들이 국천사장(菊川沙場)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 허재기가 등단하여 공약삼장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위대열은 장날인 회화면 배둔리 장터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일본 헌병대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시위대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은 제지선을 뚫고 배둔리 장터에 도착하였고, 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 등이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였다. 대한독립동맹(大韓獨立同盟) 명의로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기초하여 이를 이재홍(李在洪)에게 등사하도록 하여 각도 군에 있는 관공서에 우송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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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기 묘
허재기(1887-1969)는 고성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허재기(1887-1969)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최정주(崔正周)·최낙희(崔洛僖)·최정원(崔正元)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3월 30일 오후 1시경, 나팔소리를 신호로 개천리(介川里)·마암리(馬岩里)주민들이 국천사장(菊川沙場)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 허재기가 등단하여 공약삼장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위대열은 장날인 회화면 배둔리 장터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일본 헌병대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시위대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은 제지선을 뚫고 배둔리 장터에 도착하였고, 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 등이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였다. 허재기는 대한독립동맹(大韓獨立同盟) 명의로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기초하여 이를 이재홍(李在洪)에게 등사하도록 하여 각도 군에 있는 관공서에 우송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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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 창의비
최정원(1892-1922)은 1919년 3월 20일에 고성군 구만면(九萬面)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고성읍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작성하여 각 군면에 발송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밀파된 윤영백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을 받은 허재기와 같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3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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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 집
최정원(1892-1922)은 1919년 3월 20일에 고성군 구만면(九萬面)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고성읍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작성하여 각 군면에 발송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밀파된 윤영백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을 받은 허재기와 같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3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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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종 집
최낙종(1891-1945)은 고성군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접면인 회화면(會華面)까지 사전연락을 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서 3월 20일 구만면의 국천(菊川) 모래사장에서 군중과 함께 봉기하고 최낙종은 선두에 서서 열렬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3월 21일,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구만면 면사무소에 첨부하고 다음날 동권고문을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1920년 일본 동경에서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을 창립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대항하여 1932년까지 투쟁하는 한편, 서상한(徐相漢)·이 혁(李革)·변영우(卞榮宇) 등과 함께 월간잡지 「노동(勞動)」을 발행하여 일본과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에는 벌금 40원, 1926년에는 징역 1년 6월형과 벌금 30원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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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기 공적비
허재기(1887-1969)는 고성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1919년 3월, 허재기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최정주(崔正周)·최낙희(崔洛僖)·최정원(崔正元)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3월 30일 오후 1시경, 나팔소리를 신호로 개천리(介川里)·마암리(馬岩里)주민들이 국천사장(菊川沙場)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 허재기가 등단하여 공약삼장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위대열은 장날인 회화면 배둔리 장터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일본 헌병대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시위대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은 제지선을 뚫고 배둔리 장터에 도착하였고, 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 등이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였다. 허재기는 대한독립동맹(大韓獨立同盟) 명의로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기초하여 이를 이재홍(李在洪)에게 등사하도록 하여 각도 군에 있는 관공서에 우송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