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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동맹휴학의거비
경남 거창의 신원초등학교 동문들이 2004년 당시 신원공립국민학교에서 일어났던 항일동맹휴학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1942년 10월 10일, 일본인 교사 다카하시 마사히데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한국인 교장 이기영을 폭행하였다. 이를 보고 분연히 여긴 신원공립국민학교의 5,6학년 학생들이 항일 동맹 휴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이 터지자 일제 경찰은 당시 5, 6학년 학생 전원을 신원주재소(파출소)와 양조장 등으로 연행하여 3일간 문초를 하고 주동자로 드러난 5명의 학생, 박순유, 박윤종, 신종섭, 서판수, 정상술 등을 11일 동안 구금하였다. 이 저항운동은 일제시대 국내외서 일어난 수많은 학생 운동 중 초등학생이 직접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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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운동 모임장소 오례서원 원정비
백촌 김문기 선생의 현손인 영사공께서 여섯째 아들 장수를 데리고 영동군 미그리에서 살다가 백촌 선생께서 단종 복위운동을 하시다 처형되자 삼족을 멸한다 하여 피난처를 찾아서 거창군 신원면 덕신리 매봉산 아래 근터에 숨어 지내다 웃터에 녀려오셔 거주하시다가 현마을로 내려와 자리 잡으셨다. 마을 앞 조상걸에 돌로 조상을 모셨으니 세월이 흘러 돌 모은 것이 수해로 얿어지자 마을 안정을 위하여 현제 마을 앞 당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예전에는 조산말이라고 불렸으나 중유리 예동에 사시던 면우 곽종석 선생께서 연수사에 공부하러 다니시다 가끔 들리시면서 이 마을은 예을 꺠달았다 하면서 悟禮(오례)마을이라고 이름 지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달산공파 종중 형덕공께서 어른들을 모신 자리에서 작은 서재를 지어 집안사람들에게 한학을 시키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니깐 윤권공을 비롯한 달신공파 종중 어른들께서 받아드리자 서재 터는 내가 희사하겠노라 하며 집을 짓게 되어 시작하자 목수분들이 집을 자꾸만 키워서 지어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종파 상규공 계파 형장공께서 이렇게 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동참하여 덕은공파 종중서재를 세우자 간청하니 맏아들이 지금의 서원이 서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하여 모덕제 현판을 걸고 윤권 형장 형배 상규 영규공을 비롯한 종중 어른들께서 각 고을 선비를 모셔 유계를 치러 오던 중 거창에 이참사를 비롯한 유림선비님들이 본 손에 청하기를 단종 복위 운동을 하시다가 처형당하신 백촌 김문기 선생과 아드님이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신 여병제 현석공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지어 제례를 지내자고 청하여 본손이 받아들여 사당을 짓고 모덕제 현판을 내리고 추원제 현판을 걸어 음 3월 中丁(중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던 중 인당 진석공께서 문화재 신청을 하여 1992년에 도문화재 191호를 지정받아 1994년도에 수리 보수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에 인당 진석공께서 오례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2006년에 뜻하지 않는 수해로 인하여 서원과 충의문 남문이 유실되어 문화재청에 복원하여 2008년에 완공했다. 지금 음력 3월 中丁(충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그리하여 자손만대 기리 전하기 위하여 백촌 19세손 여러분이 기록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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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탁 묘
유희탁(1885 - 1965)의 이명은 유한제(劉漢濟)이다. 1919년 4월 8일 거창군 위천면(渭川面) 남천리(南川里)에서 정재필(鄭大弼)·이형준(李衡俊) 등과 함께 위천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위천면·마리면(馬利綿)·북상면(北上面) 등지의 주민들을 규합, 장터에서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시위군중이 일제히 화창(和唱)하였다.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속하자 일경들이 무력 탄압을 자행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일군헌병주재소를 습격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으며,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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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필 묘
정대필(1880-1938)은 거창 독립만세운동은 3월 20일의 가조면 장기리(加祚面場基里)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던 김병직(金秉直)·어명준(魚命俊) 등이 일본 헌병에게 구타당하여 반죽음 상태로 거창 일본군헌병대로 압송된 사실이 전해지면서부터 계획되었다. 이에, 그들은 3월 21일 오문현(吳文鉉)·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魚命喆)·이병홍(李秉洪)·김 호(金濩) 등 6인을 추진위원으로 선출하여 이날 가조면·가북면(加北面) 일대에 이 계획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22일 아침 거창 주둔 일본군 헌병대가 주동인물을 체포하여 취조하였다. 정대필은 가조면·가북면민 3천여명과 함께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 대형 독립기를 세운 후,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거창읍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일본군 헌병대가 공포를 발사하며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시위군중들을 계속해서 돌진하였고 결국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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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필 묘
정영필(1888-1908)은 1908년 함양(咸陽)을 거점으로 의거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문태서(文泰瑞) 의진에 입대하여 함양·거창·김천(金泉)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가지리(加旨里) 전투에서 왜적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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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탁 유적비
유희탁(1885-1965)의 이명은 유한제(劉漢濟)이다. 1919년 4월 8일 거창군 위천면(渭川面) 남천리(南川里)에서 정재필(鄭大弼)·이형준(李衡俊) 등과 함께 위천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위천면·마리면(馬利綿)·북상면(北上面) 등지의 주민들을 규합, 장터에서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시위군중이 일제히 화창(和唱)하였다.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속하자 일경들이 무력 탄압을 자행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일군헌병주재소를 습격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으며,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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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천3.1운동기념비
위천3.1운동기념비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1919년 3월 18일, 위천면 장날에 정대필,유희탁,이형준,유한탁 등의 주도로 전개된 위천면 3.1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 건립한 비이다. 이형준, 유한탁 등이 앞장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쳐 부르니, 모두가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으며 일본 헌병분견소를 덮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왜경은 사람들을 끌고가 모진 매질과 혹독한 옥고치르게 하였다. 정부는 1919년 3월 3일 장날을 기하여 정대필(鄭大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유희탁(劉熺倬 :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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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사
성암사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이주환과 그의 스승인 송병선, 송병순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주환(1854-1919)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게의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여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업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이주환의 스승 송병선(1836-1905)은 송시열의 9세손이며 송병순의 형이다. 조선 후기 문인이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송병선은 국권을 빼앗긴 뒤 자결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이 세사람을 배향하기 위해 1924년에 사당을 건립했는데, 사당은 맞배지붕의 목조기와 건물로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이고 만인재도 맞배지붕으로 조선 후기 재실 건축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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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환 묘
이주환(1854-1919)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게의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여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업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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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제 묘
김관제(1886-1951)는 1909년 안희제(安熙濟) 남형우(南亨祐) 윤세복(尹世復) 이시열(李時說) 이원식(李元植) 김동삼(金東三) 배천택(裵天澤) 박중화(朴重華) 신백우(申伯雨) 김태희(金泰熙)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 이시열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그 교사가 되어 교포자제에 대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동창학교가 폐쇄되자 1915년에 압록강 대안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그 교사로 활동하였다. 김관제 묘는 경남 고성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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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
옥천사는 경남 고성에 위치해있으며, 1920년대 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한 곳이고, 옥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1운동 전후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변상태와 이주현등은 옥천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였고, 옥천사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였다. 신화수는 1919년 4월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비멸결사 혁신단을 조직하였고, 1920년 8월 김상옥, 한훈 등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한봉진은 1920년 윤영백과 함께 옥천사를 거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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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수 집 표지석
정덕수(1923-2012)는 1941년 2월에 조성인(趙成寅), 강연중(姜鍊中) 등과 함께 항일결사조직인 개진대(改進隊)를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일제에 미국 영국 소련이 참전하게 되면 서 일제의 패망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강연중과 함께 활동조직으로서 항일결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하부조직으로서 대판내 우유배달클럽 및 신문배달클럽과 유도(酉島) 제2공업학교·관서공업학교·대판공업학교 등에 학생클럽을 결성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정덕수(1923-2012)는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1941년 2월에 조성인(趙成寅)·강연중(姜鍊中) 등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들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으며, 조성인과 항일결사 개진대(改進隊)를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일제에 미국 영국 소련이 참전하게 되면 서 일제의 패망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강연중과 함께 활동조직으로서 항일결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하부조직으로서 대판내 우유배달클럽 및 신문배달클럽과 유도(酉島) 제2공업학교·관서공업학교·대판공업학교 등에 학생클럽을 결성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