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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조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
가조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은 1919년 3월 22일 오후 2시경 가조.가북 주민 3천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처음 시작한 곳으로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표지석이다. 가조시장(加祚場市)는 조선시대부터 4일과 9일마다 5일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가조장터(가조면) 3.1만세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 육각정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남도 지방은 지역 유림이 주도하고 지역민이 참여했는데, 거창은 가조 장터 만세운동이 시작점이 되었다. 1919년 3월 19일 김호(金浩), 오문현(吳文鉉), 어명우(魚命佑), 이병홍(李秉洪), 김호(金濩), 신병희(愼炳禧), 김익동(金翼東), 김관묵(金寬黙) 등 지방 유지 50여 명이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에 집합하여 비밀회의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김병직(金秉直)[가북면 용산리]과 어명준(魚命俊)[가조면 동례리]은 1919년 3월 20일 가조 장날에 거사를 하기로 계획하고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장꾼들 500여 명이 만학정 앞에 모인 가운데 시장 중앙에서는 태극기를 든 채 만세 선창이 시작되었다. 22일에 일본 헌병이 주동 인물들을 끌고 가서 취조했으며, 주민 3,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하자 해산 명령을 내려졌다. 시위 행렬이 거세지자, 지역민과 대치하였고, 대치 과정에서 일본 헌병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가조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은 장기 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근처에 장기 버스정류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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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신도비
곽종석(1846-1919)은 영남유림(嶺南儒林)으로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3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을 참수할 것과 열국공관(列國公館)에 호소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독 유학자들만이 빠지게 된 것에 통분하여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장서에 137명의 유림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上海)로 보내게 하였고, 이후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탄로나게 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곽종석선생 신도비는 면우 곽종석 선생을 추모하고자 유림 제자들이 1921년에 설립한 다천서당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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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묘
곽종석(1846-1919)은 영남유림(嶺南儒林)으로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3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을 참수할 것과 열국공관(列國公館)에 호소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독 유학자들만이 빠지게 된 것에 통분하여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장서에 137명의 유림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上海)로 보내게 하였고, 이후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탄로나게 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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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고, 주남수 가족묘
주남고(주남선)는 1919년 8월, 오형선(吳亨善)·고운서(高雲瑞)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군자금 및 의용병을 모집하여 만주 군정서(軍政署)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김태연(金泰淵) 인솔하에 만주 군정서로 파견되었고, 1920년 3월 주남수는 다시 귀국하여 오형선(吳亨善)·송명옥(宋明玉) 등과 함께 신한별보(新韓別報)등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21년초에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8년 12월에는 거창(居昌)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40년 1월에는 경남의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모임을 이끌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주남수는 경남 거창(居昌) 사람이며, 1919년 8월 형 주남고(朱南皐)의 권유로 김태연(金泰淵)의 인솔하에 이사술(李四述)·이성년(李聖年)·백기주(白基周) 등과 함께 만주군정서(軍政署)에 의용병으로 파견되었다. 1920년 3월에 만주군정서 의용군으로서 다시 국내에 파견되어 오형선(吳亨善)·송명옥(宋明玉) 등과 함께 신한별보(新韓別報)라는 독립사상에 관한 문서를 오형선 집에서 수천부를 등사하였다. 이어 이 문서를 정장현(鄭章鉉)·이갑수(李甲洙)·안덕보(安德保)·유진성(兪鎭成) 등에게 배포하다 거창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1년 1월 8일 소위 제령(制令) 및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 송치되었다. 그러나 동년 9월에 탈출하여 다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중 순국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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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환 사적비
이주환(1854-1919)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게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여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없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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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고 추모비
주남고 추모비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주남고(1888-1951)의 이명은 주남선(朱南善)이다. 주남고 추모비는 전면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계시록 2:10', 후면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요한복음 8:32'라고 적혀있으며, 주남고약력과 거창교회 약사가 적혀있다. 주남고는 1919년 8월, 오형선(吳亨善)·고운서(高雲瑞)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군자금 및 의용병을 모집하여 만주 군정서(軍政署)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김태연(金泰淵) 인솔하에 만주 군정서로 파견되었고, 1920년 3월 주남수는 다시 귀국하여 오형선(吳亨善)·송명옥(宋明玉) 등과 함께 신한별보(新韓別報)등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21년초에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8년 12월에는 거창(居昌)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40년 1월에는 경남의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모임을 이끌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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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수 집
윤철수(1868-1942)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김창숙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결국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지만,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윤철수도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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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충하 묘
윤충하(1855-1946)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모집한 당원에 가입하여 1907년 음력 2월 초순 두 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처단을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붙잡힌 후 모진 악형과 심문을 받고 유형(流刑) 10년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1919년 2월 거창에 있는 곽종석(郭鍾錫)을 방문한 그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대한 내용과 전망, 서울 유림(儒林)들의 독립문제에 대한 동태를 세밀히 보고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권유했고,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곽윤·김황 등과 함께 상경하여 김창숙(金昌淑)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921년 9월 태극단(太極團)의 대표로 태평양회의에 일본의 한국 강점을 부인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한국정부로 승인해 줄 것과 파견된 한국위원의 출석권을 요청하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윤충하 묘는 경남 거창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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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공삼형제 항일사적비
박공삼 형제 항일사적비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의진활동을 한 박화기, 박수기, 박민기 삼형제의 항일애국정신을 기리고자 2004년 11월 건립된 비이다.경남 안의면 출신으로 박화기, 박수기, 박민기 삼형제는 모두 오일선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등을 지르면서 항일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박화기, 박수기는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고, 박민기는 1912년 4월 26일 안의군 북상면 양지리에서 최고미를 처단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박민기는 피체되어 징역 10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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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기 묘
박화기(1871-1909)는 이명은 박순경(朴順敬)이고, 박공삼형제(박화기, 박수기, 박민기) 중 장남이다. 오일선(吳馹善)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박화기는 동생 박수기(朴洙箕)·박민기(朴岷箕) 등과 함께 오일선(吳馹善)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으며, 의진의 아장(亞將)에 임명되어 동생 박수기·유춘일(劉春一) 등과 함께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文泰瑞)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동생 박수기(朴洙箕)와 함께 무주수비대(茂朱守備隊)에 의해 붙잡혀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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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의거사적비
월성의거사적비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1906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오일선(吳馹善), 김성진(金成鎭) 등이 거창 북상면 월성 서당에서 모여 일제에 투쟁을 목표로 무장 항거한 의병 운동을 기념하고, 애국정신을 고취하고자 세운 비이다. 본 비는 재건립된 것이다. 월성 의병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1906년에 남덕유 월성에서 봉기하여 일어났다. 40여 명이 항일 의거를 결의하고 산중에서 활동하였으며, 덕유산 의병 200여 명에게 자금과 군수 물자도 조달했다. 1908년 7월11일자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에도 덕유산에 약 40명의 의병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월성 의거 사적비는 월성리 양지마을 앞 월성숲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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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노농림계원유적비
거창의 월성의병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북상면 월성리에서 오일선(吳馹善)을 중심으로 김성진(金成鎭)·김현수(金顯壽)·하거명(河巨明)·박화기(朴華箕) 등 40여 명이 월성서당에 모여 의병 봉기를 결의하고 도총·유격·후군·군수·정보 등의 부서를 편성하고 부대의 이름을 월성의병이라 하였다. 월성의병은 1906년 문태수가 이끄는 호서의병과 제휴하여 싸우기도 하고, 덕유산 의병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1906년 9월에는 호서 의병과 연합하여 장수와 무주 고창골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1908년 구천동 전투에서 하거명과 김권원이 전사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박화기·박수기·유춘일 등이 전사하면서 월성의병의 그 세력이 꺾이게 되었다. 1910년 이후 의병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과 진주·전주에서 옥고를 치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