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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연 묘
왕광연(1872 - 1951)은 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경 마을주민들과 함께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8일에도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1,000여 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출장 온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홍면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총상을 입히자,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며 도망가는 노구치를 추격하여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난타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왕광연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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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유 묘
홍덕유(1887 ~ 1947)는 1916년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후, 1919년 국내로 돌아와 민립대학기성준비회 준비위원, 신사상연구회,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 화요회 등에 참여했다. 또한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및 위원을 역임하고, 상하이에서 국내로 공산주의운동 지원금 및 항일격문을 들여오는 것뿐만 아니라 6.10만세운동 준비에 관여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준비과정이 발각돼 촉발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1928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석방되었으며, 출옥한 이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경리부장, 공무국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 결성 참가 등 공산주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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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칠보 묘
공칠보(1884 - 1939)는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으로, 오산장날인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오산시장 만세운동 계획에 참가,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등 준비 후 시장에 모인 3백여 명의 군중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도중 일경에 붙잡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면장에 대항하여 면사무소를 점령하고 우편소와 일본인 상점을 부수면서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 혐의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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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 시위지 쌍봉산
쌍봉산은 화성 지역 3.1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지로 해발 117m이며, 장안면과 우정면을 아우르는 산이다. 1919년 4월 3일 주곡리를 출발하여 석포리, 수촌리를 거쳐 어은리의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군중들은 면사무소의 서류와 집기를 파괴하고 전부 불태워버렸다. 이후 쌍봉산 남쪽 봉우리에 올라 만세를 부르며 독립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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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희식 집 터
차희식(車喜植)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차병한(車炳漢)·차인범(車仁範) 등의 동지와 함께 화성군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듣고, 차병한·차병한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계획을 알려서,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연락하는 한편, 자신은 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과 함께 석포리(石浦里) 주민들에게 참여하도록 홍보하였다. 군중 200여 명이 모인 장안면 사무소에서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다시 이들은 인근의 쌍봉산(雙峯山)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이어서 차병혁·차인범(車仁範)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불어난 만세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다시 석포리 이장 차병한의 제의로 화수리(花.樹里)에 있던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하였다. 이 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이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가자, 차인범·정서송(鄭庶松)·이순모(李順模)·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 등과 함께 추격하여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9년 2개월만에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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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리 중리 만세시위지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화성지역은 여느 지역보다 격렬한 3.1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우정·장안지역의 만세운동은 종교와 계층을 초월한 대규모 무력항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장안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와 주재소(화수경찰관주재소)가 파괴 · 방화되고 일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처단되었다. 그 중에서 각리, 중리는 만세운동을 펼치던 시위대가 우정면사무소에서 시위를 마친 뒤 화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여 이동할 때 지나간 마을이다. 죽리에는 당시 우정면장인 최중환의 집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우정면장을 만세시위에 동참시키기 위해 그의 집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최중환은 군중이 이동할때까지 계속 숨어있었고, 그의 늙은 아버지만 남아있자 군중은 발걸음을 옮겨 한각리 광장으로 이동한다. 현재 다른 유관 사적지들과 함께 화성 3.1운동 만세길로 묶어져 관리되고 있고, 이 내용을 담은 안내판도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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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각리 광장터(화성3.1운동만세길)
2019년 개통된 화성3.1운동만세길의 13번째 코스인 한각리 광장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안내판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화성 지역 3.1운동은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쌍봉산에서 우정면사무소로 내려왔다. 시위 군중들은 각리와 죽리를 거쳐 한각리 광장으로 이동하였으며 한각리 주민들은 한각리 광장으로 들어오는 시위 군중과 함께 대열을 정비하여 화수리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시위 군중의 한 무리는 오른쪽의 솔밭길을 넘어서 이동하고 다른 무리는 왼쪽의 한각리에서 화수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화수리 주재소를 향해 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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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방 묘
김연방은 대한제국의 시종원시어(侍從院侍御)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에 화성시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3일 아침 일찍부터 화성군 장안면 석포리와 우정면 주곡리 주민들이 합류하여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고, 장안면 수촌리 주민 100여 명도 합세하여 장안면사무소에 모인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시위를 촉구하였다. 이어 시위 군중은 우정면사무소로 갔으나 면장과 서기들이 이미 도망치고 없자, 화수주재소로 이동하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의 총격에 대응하여 주재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였다. 일제는 1919년 4월 4일부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구타와 방화, 고문 등을 자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연방은 4월 13일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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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순국지사 추모비
김연방은 대한제국의 시종원시어(侍從院侍御)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에 화성시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3일 아침 일찍부터 화성군 장안면 석포리와 우정면 주곡리 주민들이 합류하여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고, 장안면 수촌리 주민 100여 명도 합세하여 장안면사무소에 모인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시위를 촉구하였다. 이어 시위 군중은 우정면사무소로 갔으나 면장과 서기들이 이미 도망치고 없자, 화수주재소로 이동하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의 총격에 대응하여 주재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였다. 일제는 1919년 4월 4일부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구타와 방화, 고문 등을 자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연방은 4월 13일 일본 헌병의 총탄에 순국하였고, 가옥은 모두 불탔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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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우정읍)
1919년 3.1운동은 화성시 전역에서도 전개되었는데, 4월 1일 저녁 9시 우정면 장안면의 보금산, 개죽산, 무봉산 등 산마다 횃불을 올려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4월 3일 새벽 5시 우정면 주곡리를 출발한 만세 시위대는 장안면 석포리와 수촌리의 주민들과 힘을 합쳐 어은리의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이어 우정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한데 이어 화수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주재소에 투석, 방화하고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참살하였다.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보복했으며, 이로 인해 화산리 김연방과 하수리 송성호가 순국했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의 마을마다 불을 질러 가옥 100여 채를 불태웠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13명에 이르렀다. 이 기념비는 1919년 당시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 장안면 수촌리 등지에서 전개되었던 3.1독립만세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9년 8월 15일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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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리 주재소터
이곳은 화성지역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항쟁지인 화수리 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시위군중들은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불태우고 화수리에 도착하여 주재소를 에워싼 다음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는 시위군중들에게 총을 쏘면서 달아났고 시위대는 주재소를 모두 불태운 후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화수리 마을은 주재소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가옥이 불타는 등 보복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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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참살터
이곳은 시위군중들이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처단한 곳이다. 1919년 4월 3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은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화수리 주재소에서 근무하던 순사 가와바타는 시위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도망쳤다. 그 과정에서 이경백을 비롯한 시위군중들이 부상을 입고 희생당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달아나던 가와바타를 붙잡아 처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