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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선 집 터
홍명선(1900 - 1974)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홍 면(洪면) 등과 함께 사전에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6일부 면사무소에서 200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전개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 면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날 오후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과 함께 인근의 산에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경은 주동자 홍 면 외에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 면이 갑자기 일어나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야구광삼이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 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자기에게 발포한 일경을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시위군중들의 분노하여 야구광삼에게 달려들자, 그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했다. 이 때 격분한 그는 일경을 홍 면의 동생 홍준옥(洪준玉)·장인 김명제(金命濟)·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김교창(金敎昌) 등과 추격하여 미처 주재소에 도착하지 못한 일경을 도로에서 포위하고 투석으로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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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집
박영호(1899 - 1994)는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그는 3월 26일부터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 면의 권유로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경은 주동자인 홍 면 외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 면이 갑자기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야구광삼이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 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며 일본인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시위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여 야구광삼에게 달려들자, 그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홍 면의 동생 홍준옥·홍 면의 장인 김명제(金命濟)·김교창(金敎昌)·왕광연(王光演)·김용준(金容俊) 등과 추적하여 투석으로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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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운 집 터
민용운(1876 - 1929)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부터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 면의 권유로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경은 주동자인 홍 면 외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 면이 갑자기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야구광삼이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 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며 일본인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만세시위군중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여 야구광삼에게 달려들자, 그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했다. 이 때 그는 홍 면의 동생 홍준옥·장인 김명제(金命濟)·김교창(金敎昌)·왕광연(王光演)·김용준(金容俊) 등과 추적하여 투석으로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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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득 집 터
오광득(1879 - 1947)은 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경 경기도 화성(華城)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홍 면(洪冕, 일명 洪冕玉) 등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틀 뒤인 28일 사강리에서 재차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오광득은 다시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때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노구치 코우조[野口廣三]가 출동하여 시위군중에게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해산하지 않자 순사부장은 주도자인 홍 면 외 2명을 체포하여 앉혀두었다. 오후 3시경, 앉아있던 홍 면이 갑자기 일어나 만세를 부르자, 순사부장은 홍 면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홍 면의 등에 명중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홍 면은 그에게 돌진하며 군중을 향하여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홍 면의 동생인 홍준옥(洪埈玉)과 문상익(文相翊)·왕광연(王光演) 등이 격노하여 순사부장에게 달려들었고, 겁에 질린 순사부장은 자전거를 타고 남양(南陽) 방면으로 도망하였다. 당시 송산면사무소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던 그는 군중과 함께 순사부장을 추격하여 동리 동쪽 끝에 있는 사강주재소 부근 도로에서 그를 포위하였다. 이 때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순사부장에게 돌을 던져 땅바닥에 넘어뜨린 뒤 돌로 순사부장을 내리치고 곤봉으로 가격하였다. 그 결과 순사부장은 현장에서 뇌진탕과 골절로 즉사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죄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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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식 집 터
이윤식(1879 - 1955)은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28일 수원군(현재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송산면의 만세운동은 3월 26일부터 시작되었다. 동일 오후 5시에 홍면옥(洪冕玉)이 면사무소 근처에서 태극기를 걸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이윤식은 홍면옥의 취지에 찬동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어 이들은 3월 28일 오후 송산면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는데 시위에 참가한 군중은 1천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시위 도중 주동인물인 홍면옥이 붙잡히는 일이 있었고, 붙잡힌 홍면옥은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고무시키다가 총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총격을 가한 일경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였다. 이 때 이윤식은 왕광연(王光演) 등과 함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도망가는 일경을 추격하여 붙잡아 투석과 구타로 일경을 즉사케 하였다. 그는 이 일로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살인 등의 혐의로 징역 6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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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부장 노구치 처단 장소
1919년 3월 28일, 사강시장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을 진압하던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애국지사 홍면옥에게 총상을 입히고 군중을 피해 도망치다 붙잡혀 처단 당한 장소에 세워진 조형물이다. 1919년 3월 21일, 동탄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송산·서신·마도’, ‘향남·팔탄’, ‘장안·우정’ 등 화성 곳곳으로 만세운동이 번져갔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2시 경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사강리 주민 홍면옥 등의 주도로 만세를 불렀다. 사강리 장날을 맞이해 송산면과 서신면 등지에서 모인 500~600명의 군중이 함께 구한국국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을 외쳤다. 오후 3시경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송산면사무소 뒤에서 홍면옥·홍효선·예종구 등 3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옥은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격분한 군중이 ‘순사를 때려 죽이라’고 외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형세가 위험해졌다. 노구치 순사부장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의 경찰관주재소에서 남양 방면으로 도주했다. 그러자 200명가량이 군중이 추적하여 자전거를 넘어뜨리고 순사부장을 돌과 몽둥이 등으로 난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수사부장이 사망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후 여러 날에 걸쳐 경찰관헌과 수비대가 사강리의 가옥 200여호를 불태우고 10여인을 총살하였다는 사실이 홍면옥, 문상익의 고등법원 상고추가취의서에 기재되어 있다. 또 수원경찰서에서의 고문 상황에 대한 서술과 함께 경찰 신문 과정에서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최소 고문 과정에서 1명 사망, 사강리에 들어온 군경의 보복 과정에서 10여명 사망이 확인된다. 10여명의 정확한 수치를 확정할 수는 없어서 11~16명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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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중심지 사강시장
3월 26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100~200명이 송산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에서 구한국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이고 서신면 방면으로 행진했다. 3월 26일 오전에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의 구장 홍명선 집에서 계원 120명이 모여 계모임을 할 때 사강리에 사는 홍효선의 제안으로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오후 2시경 면사무소 뒷산에서 다수 사람들이 홍면옥(홍면)의 주도로 만세를 불렀으며, 오후 4시 경에는 주민 100~200명이 송산면사무소로 몰려가 구한국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수십 명이 면사무실로 들어가 면장과 서기들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여 만세를 외치게 했다. 시위군중은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은 물론이고 마을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고, 저녁에 남쪽 서신면 방면으로 행진해 밤 11시경에 해산했다. 이 시위는 3월 28일 사강장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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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현 집 터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였다. 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경 홍면(洪玉+冕, 이명 洪冕玉)은 사강리에 위치한 송산면사무소 근처에서 태극기를 내걸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를 본 차경현 등 군중은 홍면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틀 뒤인 28일 오후 2시경 송산면사무소 뒷산에서 홍면을 비롯한 1,00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홍면 등은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과 면서기 등에게 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가 홍면 등 2~3명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에 홍면 등이 저항하자, 노구치는 권총을 꺼내 홍면을 쏘아 사망시켰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일본 경찰을 죽이라고 외치자, 노구치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주재소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에 차경현 등 시위 군중은 뒤쫓아 가면서 돌을 던졌다. 마침내 노구치가 돌에 맞아 자전거에서 떨어지자, 차경현 등은 일본인 순사를 돌과 몽둥이로 처단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차경현은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살인,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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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경찰관주재소
송산지역 만세운동 당시 주민들을 탄압했던 일본 경찰관 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3월 28일 만세운동 당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는 주민들을 향하여 총을 쏘며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면옥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주재소에 들어 자전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던 노구치는 주민들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후 일제는 사강리를 중심으로 부근 20여개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실시하여 가옥에 불을 지르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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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면사무소 터
송산지역 만세운동 당시 송산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1919년 3월 26일 호세 납부를 위해 모인 주민과 이후 합류한 200여 명의 주민들이 사강장터를 거쳐 면사무소로 이동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 사강장날 오전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오후가 되자 참여 인원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송산지역 주민들은 면사무소 뒷산(현 송산초등학교)과 그 부근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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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
송산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6일 사강리에서 홍면옥(일명 홍면)의 지휘 아래 만세를 부르며 시작되었으며, 이틀 뒤 사강장날 3월 28일 인근 면민 1,0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당황한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이 총을 쏘며 탄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홍면옥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울분을 참지 못한 군중이 순사부장을 붙잡아 때려죽임으로써 이에 앙심을 품은 왜인과 헌병이 앙심을 품고 총칼을 휘두르며 불을 질러 180여 호가 잿더미가 되고 목숨을 잃었다. 이에, 그 아픔을 위로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되새기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삼일동산을 만들고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만세운동이 있었던 송산면사무소의 뒷산은 지금의 송산초등학교 후문으로, 학교 교정 내에 삼일동산을 조성하고 1979년 3월 1일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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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초등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6일과 28일에 송산면 주민 1,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6일 홍면옥(일명 홍면)은 송산면사무소 근처에서 태극기를 내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사강리 만세운동을 이끌었으며, 송산면 사강장날이었던 3월 28일에는 송산면사무소 뒷산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이 총을 꺼내 탄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홍면옥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울분을 참지 못한 20여 명이 순사부장을 뒤쫓아 돌과 몽둥이로 그를 처단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왜인과 헌병이 앙심을 품고 총칼을 휘두르며 불을 질러 180여 호가 잿더미가 되고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