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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수 공적비
경현수(1861~1928)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성균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13도유약소에 가담하여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13도유생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를 올렸으며, 1908년 13도 의병 연합부대의 총대장인 허위의 부대에 종군하였다. 그 해 2월 허위의 지시에 따라 청국(淸國) 혁명당(革命黨)에 군사 원조를 청하는 밀사로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의 국상 당시 장남 경우현과 함께 유림역사대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장남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1920년 3.1운동 1주년에는 의거를 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충절과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보훈처와 후손 및 후학들이 1985년에 공적비를 건립하였으며,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청주경씨 감역공 종중 묘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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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묘
조광철(1891~1951)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광철은 1919년 3월 17일 의주군(義州郡) 고성면(古城面) 대산동(臺山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서당 교사 이영수(李永秀)가 경찰에 잡혀가자 조광철은 이에 항의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조광철은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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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국 묘
문윤국(1877~1954)은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의 기독교(基督敎)인으로, 1919년 3월 7일 선천군 아이포 일대와 정주 오산중학교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3월 7일 선천군 아이포 면사무소 뒷산에 모인 4천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다가 체포되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임시정부에 토지를 처분한 돈 7만원을 군자금으로 조달하는 등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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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숙 위령비
문창숙(1898~1928)은 황해도 신계(新溪) 사람으로, 1919년 신계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 동년 9월경 신흥무관학교 수료 후, 1923년 참의부(參議府) 중대부사(中隊副士)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부하 17명을 이끌고 집안현(輯安縣)에서 밀정 홍종흡 사살 및 항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참의부 중대장으로서 국내에 진입하여 적과 수차 교전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음력 11월에는 평북 강계 지방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동년 4월 23일 평양형무소에서 3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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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3.1운동기념비
1919년 파주시 3·1운동 발상지인 광탄면에서 심상각, 김웅권의 주도로 1919년 3월 27일 봉일천 장날 19인의 동지회원이 앞장서 광탄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행진을 하였으며, 조리, 아동, 월롱, 광탄, 교하 등지에서 모여든 5천여 군중과 함께 조리읍사무소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습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왜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선열의 위훈을 받들고 3.1운동 정신을 이어받고자 파주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1978년 3월 1일 기념비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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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공릉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파주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자, 파주 지역에서 최대 규모의 시위가 전개된 곳이다.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의 심상각은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이근영, 이종구, 유영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들 대표 19인은 광탄면 발랑리를 중심으로 인근 고양군과 연합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27일에 시위대 2,000여 명은 봉일천리의 공릉장으로 행진했고, 공릉장에 모여 있던 주민 1,000여 명과 합류하여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박원선 등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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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환 묘
한명환(1901~1996)은 함경남도 함흥(咸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2일 당시 함흥군 함흥면에 있는 영생학교 2년생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고 태 90도가 확정되어 집행 받았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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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추모비(장준하 기념공원)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진강과 자유로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3,967㎡(약 1,200평) 규모로 파주 통일동산에 장준하공원을 조성하였으며, 공원 조성과 함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추모비는 장준하의 흉상 부조와 함께 장준하의 생애와 공적을 기록한 일생을 새긴 24×25m 규모의 석조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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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동상
조만식(1883~1950)은 평남 강서 출신으로, 구한말에서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1913년 일본 명치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정주군 오산학교 교사에 취임하고 이후 교장에 올랐다. 1919년 3·1운동 때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오산학교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 조선물산장려회 주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평양지회장 등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과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당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1970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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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남 구 묘
황진남(1897~1970)이 1919년 캘리포니아대학을 다니던 도중, 3월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 전해졌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부하던 황진남은 애국하는 충심이 극도에 달하여, 무슨 방면으로든지 나랏일에 한 부분을 돕고자 하여 자원 퇴학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1919년 3월 15일에 재류동포전체대표회를 열고 독립운동 방침을 결정하였다. 전체대표회결의안 제6항에 의하여,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를 재미한인의 대표로 선정하고, 황진남과 정인과(鄭仁果)를 통신원으로 임명하여 중국 상하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고,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의원들을 지방회에서 선거하도록 하였다. 황진남과 정인과는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영문에 능숙하여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한국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문선전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920년 2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5과(교통)의 상임위원이 되었고, 그해 3월 16일자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의 기사가 실렸다. 1920년 8월 8일 황진남은 상하이의 대동여사에서 개최된 유학생 주최 미국의원단 환영회에서 참석하였다. 황진남은 여운형·장덕준과 함께 8월 16일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의 한국지배 실상을 설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황진남은 1921년 2월 17일 임병직(林炳稷)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프랑스배 아토란츠크호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였다. 황진남은 3월 30일 파리로 가서 파리위원부로 갔다. 그는 원래 파리에서 영국 런던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5월 18일 독일로 가게 되었다. 독일로 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광산학을 전공했다. 독일에서 학업을 하던 황진남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8.15해방 이후 월남하여 여운형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으로 가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이라는 한국어 방송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방송 활동에 종사했다. 1970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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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근 묘
노형근(1884~1960)은 황해도 금천(金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이상로(李祥老)·황 찬(黃 ) 등과 함께 백마면 용성리(白馬面龍城里)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면사무소에서 80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그는 일제의 주동자 검속 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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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진 묘
유화진(1899~1961)은 3.1운동당시 선린상업학교 학생으로, 우리 역사를 배울 수 없고 일본이 출판의 자유를 주지 않는 것 등에 불만을 느껴 조선이 독립이 되는 것을 희망하였다. 유화진은 1919년 3월 1일 오전 학교에서 ‘오후 1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시위 당일 오후 서울 남대문, 서대문, 종로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7일 체포된 유화진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 90일 통산)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2월 7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