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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각 집 터
심상각(1888~1963)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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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각 표창장, 훈장증
심상각(1888~1963)은 경기도 파주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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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묘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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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각 묘
심상각(1888~1963)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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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진 묘
정태진(1904~1952)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편찬원이 되었고, 1942년 9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 후, 1945년 8월 조선어학회를 다시 조직하여 〈큰사전〉 편찬을 계속하였으며 대학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52년 〈우리말 큰사전〉 속간을 위해 서울에서 편찬사업에 진력하다가 귀향 도중 교통사고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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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교하 3.1독립운동기념비
「파주 교하 3·1 독립운동 기념비」는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여성독립가 임명애와 학생들의 함세 함성을 시작으로, 와석면 일대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던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의 공훈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기념비의 기단부의 원형 3조각은 3.1운동의 『3』, 세로 기둥은 『1』을 상징하여, 좌대 부분 아래로부터 위로 퍼지는 삼각형 조각 형태는 힘찬 『만세함성』을 상징한다. 2019년 3월 10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날의 힘찬 함성과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여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파주의 첫 만세시위 근원지인 교하초등학교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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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교하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교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0일에 구세군 교인이었던 임명애는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 100여 명을 독려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김수덕, 김선명과 앞으로 시위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를 논의한 뒤, 참가할 사람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만들어 와석면 당하리 일대에 배포하였다. 임명애는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김수덕과 김선명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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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와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파주군 와석면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던 곳이다. 1919년 3월 25일에 임명애, 김수덕, 김창실, 염규호 등은 염규호의 집으로 모여 시위를 계획하고 주민 참여를 독려하는 통문을 제작, 배포하였다. 다음날인 3월 26일에 임명애 등 주민 700여 명은 와석면사무소로 행진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파주 분견소에서 급파된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최홍주가 순국하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임명애는 징역 1년 6개월, 염규호와 김수덕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김창실은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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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경 순국터
반하경(미상~1910)은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으로,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파주 삽다리 장터에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서를 꺼내고 할복 자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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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진 기념관
정태진(1904~1952)은 한글학자이며 독립운동가로서,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편찬원이 되었고, 1942년 9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 후, 1945년 8월 조선어학회를 다시 조직하여 〈큰사전〉 편찬을 계속하였으며 대학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52년 〈우리말 큰사전〉 속간을 위해 서울에서 편찬사업에 진력하다가 귀향 도중 교통사고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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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주 묘
송기주(1890~1950)는 충남 서천(舒川) 사람으로, 당시 개정면 구암리(龜岩里) 기독교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 군산(群山)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독립선언문 선언서를 비밀리에 수천 매 영명학교에서 복사하여 군산 부내에 배포하였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2000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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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 묘
한명수(1893~1966)는 1919년 3월 8일과 9일에 경북 김천군 김천면 황금정교회에서 김수길·김충한·최용수 등과 만세시위 계획 및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기초하고, 인쇄와 배포 등을 분담하였다. 한명수는 3월 10일 김천군 금릉면 교동 예수교회당에서 다음 날 의거에 참가하라고 교인들을 독려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소위 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2006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