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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부조
춘사 나운규(1902 - 1937)는 함북 회령(會寧) 사람으로,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 항일전을 전개하였는데 4명의 동지와 함께 회청선(會淸線) 7호터널 폭파 및 전선절단 임무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1921년 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한국 영화예술 개척 및 「아리랑」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하여 일제하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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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애국지사 공훈비
이천시 설봉공원에 있는 충효동산에는 고려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천이 낳은 충신과 애국지사, 그리고 효자와 열녀 72명을 기리고 있는데, 거란의 소손녕이 침입해 왔을 때 외교의 힘으로 물리친 장위공 서희(章威公 徐熙) 장군을 중심으로 오른쪽 벽면에 이천을 빛낸 22분의 애국지사의 공적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소개되어 있는 애국지사는 다음과 같다. 구연영(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김봉기(의병, 애국장, 1991년), 임형순(의병, 애국장, 1995년), 전덕기(계몽운동, 독립장, 1962년), 박정심(의병,애족장, 1995년), 윤순채(의병, 애국장, 1995년), 박경채(의병, 애족장, 1995년), 구정서(의병, 애국장, 1991년), 김원조(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유성근(만주방면, 애국장, 1990년), 이기룡(임시정부, 애국장, 1991년), 박종설(3.1운동, 대통령표창, 1995년), 이상혁(3.1운동, 애족장, 1990년), 한석동(3.1운동, 애족장, 1990년), 권중효(3.1운동, 애족장, 1990년), 이수흥(만주방면, 독립장, 1962년), 유택수(만주방면, 독립장, 1968년), 유남수(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현국(문화운동, 애족장, 1990년), 나기창(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기주(광복군, 애족장, 1990년), 박영순(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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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장터 3.1운동만세시위지
오천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마장면 주민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마장면 관리에 사는 이창호·김기재·박종설 등은 오천리 장날인 1919년 3월 30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각 동리에 통문을 들렸다. 그러나 표광수의 밀고로 오천주재소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한 탓에 낮에는 시위를 벌이지 못하고 이날 오후부터 밤까지 각 마을 단위로 만세 운동과 함께 봉화 시위를 벌였다. 오천장터 만세 운동은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계속되었다. 천도교인들이 주도한 시위대는 규모가 1,000여 명에 이르렀고, 일제 경찰과 격렬한 충돌 끝에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재 이천시 마장면 오천리 공영주차장 도로변 전봇대 옆에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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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모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모가면 주민 15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곳이다. 모가면 만세운동은 이 마을에 사는 권중효와 한석동이 주도하여 일어났다. 권중효는 신둔면 만세 운동을 위한 사전모임에 참가하였다가 자신의 마을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매형인 한석동과 상의하였다.1919년 4월 2일 권중효와 한석동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한 끝에 인근 응봉산(매봉재)에 함께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 다수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주동자인 권중효, 한석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권중효 선생과 한석동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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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백사면사무소는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이수흥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습격한 곳으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곳이다. [백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 백사면 만세 시위는 송말에 사는 임덕재·임예재·임경순·임재순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2일 마을 사람들을 인솔하고 송말리 앞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후 면 소재지가 있는 현방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 참가자의 수가 점점 불어나 많은 수의 군중들이 현방리에 모여들었는데, 당시 백사면장인 이연의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애국지사 이수흥 선생] 이수흥은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으로서 19세가 되던 해에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길림성(吉林省)에 세운 신명(新明)학교를 졸업하였다.1923년 7월경에는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확대 개편되자 의군부 총재 채상덕(蔡相德)의 부하로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그후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담한 그는 1925년 새총독이 시찰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압록강 상의 증기 란치(steam launch : 船載大型端艇)에서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한편 그는 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어 1926년 5월에 모젤권총 1정과 동 실탄 147발, 부로닝 구식 권총 1정과 동 실탄 29발을 휴대하고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주살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그는 먼저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동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平山郡安城面發站里)에 사는 김상렬(金相烈)을 찾아가 요청하였으나 뜻일 이루지 못하였다.다시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邑內面中里)에 사는 유택수(柳澤秀)의 집으로 가던 도중 동월 10일 서울 동소문(東小門)파출소를 습격하여 보초근무중인 일경 덕영승차(德永勝次)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동년 9월 9일에는 안성(安城)에서 유택수와 함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는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을 사살하였다.그리고 10월 20일에는 경기도 이천군 현방(玄方)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백사(柏沙)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宋天義)를 사살하였다.그는 그후 새로운 계획을 위하여 변장하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동년 10월 25일에는 동지 유택수(柳澤秀)로 하여금 서울 수은동(授恩洞)에 있는 대성호(大成號) 전당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게된 그는 부득이 수원(水原)으로 내려가 발상하였다. 이때 이천경찰서장 하기(河岐)는 범인의 신장이 불과 5척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였다.이에 따라 일경 3천여명이 동원된 삼엄한 계엄상태의 3개월 동안, 4대사건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수행하던 그는 유택수와 함께 11월 6일 체포되어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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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순 순국추모비
임형순(1871 - 1908)은 조선 후기 항일 의병장으로 1907년 7월에 이천창의소를 결성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이천을 중심으로 여주·광주·양평·용인·안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십 차례 전투를 하였다. 그 뒤 본거지를 이천과 광주의 접경인 원적산에 두고 양평과 광주를 연계 교차하면서, 이천·광주·양평·여주 등지를 유격전으로 수시로 습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하였다. 수많은 항전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그였지만,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에 밀려 제천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908년 5월 안동전투에서 교전하다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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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기념비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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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둔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신둔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1일 이천군 신둔면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곳이다. 이천군 신둔면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수광리에 위치한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일어났다. 이천군 신둔면 수하리에 살던 서기창, 이상혁 등이 주도한 신둔면 만세시위는 3월 31일 같은 마을에 사는 김명규의 집에서 거사 준비모임을 갖고, 김영익이 거사의 취지와 장소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같은날 집집마다 이를 회람시켰다. 4월 1일 신둔면사무소 앞에 약 5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자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행렬은 이천읍내로 향하였는데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나, 이천 주둔병이 총칼로 강력히 제지하여 모두 해산되었다. 이날 밤에는 신둔면·모가면·백사면·대월면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했으며, 이것이 마침내 이천군내 연합시위로 전개되었다. 서기창(1893~1930), 이상혁(1893~1921), 김영익(1885~1934)은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이천군 신둔면 수하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많은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5월 8일에 서기창과 이상혁은 징역 1년형을, 김영익은 태 90도를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서기창과 이상혁에게 추서했다. 또한 대통령표창을 1986년 서기창과 이상혁에게, 2011년에는 김영익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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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 신둔면의거기념비
이천군 신둔면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수광리에 위치한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일어났다. 서기창·이상혁은 3월 31일 김명규의 집에서 거사 준비모임을 갖고, 김영익이 거사의 취지와 장소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집집마다 이를 회람시켰다. 4월 1일 신둔면사무소 앞에 5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자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행렬은 이천 읍내로 향하였는데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나, 이천 주둔병이 총칼로 강력히 제지하여 모두 해산되었으나 그날 밤 신둔면·모가면·백사면·대월면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했다. 당시 운동을 주도한 서기창·이상혁·김영익·이치조·송면호·권중효·김순철 등 7명이 체포되어 고문과 옥고로 순국하였다. 이천 신둔면 지역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한 7명의 공적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 4월 2일 신둔면 한천회에서 본 비를 건립하였으며, 신둔체육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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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기 추모비
김봉기(1865~1908) 의병장은 1907년 들어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어 국권상실의 위기에 빠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난 정미의병기에 의병 봉기의 뜻을 세우고 1907년 7월 초순 포수 32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총대장이 되어 의병들을 이끌고 이천읍을 습격하여 일본 기병대와 접전을 벌였다. 그 후 새로 가담해온 의병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서 광주·양근·지평·여주·이천 지역을 누비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많은 전과를 세웠다. 그러나 전직 한국군 정위였던 홍병수의 꾐에 넘어가 홍세영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08년 3월 13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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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병전적비
이천의병전적비는 1896년 1월 18일 이천 옛 백현(신둔면 넋고개)에서 이천수창의소 의병들이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을 맞선 백현전투의 승리와 이천 의병들의 구국정신을 기리고,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다 전사한 의병열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88년에 건립되었다. 넋고개 백현전투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구한말 최초의 항일 의병운동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을미의병의 최초의 승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7일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병진을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총대장은 민승천이 되어 구연영, 조성학, 김태원 등이 삼기구 대법(1기를 각 3대로 나누어 편성)에 따라 부대를 편성하였고, 옛 백현(신둔면 넋고개)에서 일본군 180여 명과의 전투에서 144명을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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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조 집 터
김원조(1884~1922)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대한군정부 부원으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한 인물이다. 이천 지역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부에 가입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 연락기관 설치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2일에 낙원동 부호 신완식에게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같은 달 25일에는 조정윤의 집을 습격하는 등 모금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2월 28일에 고향인 이천군 율면 총곡리에서 은신하던 중 독립단 사건의 주모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22년 4월 15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