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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목 묘
권종목(1886 - 1959)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蒲谷面)에서 삼계리 주민 2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가 이끄는 시위대는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금어리(金魚里)로 진출하여 200여 명의 시위대와 합류하여 연합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둔전리를 거쳐 대대리에 이르기까지 행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붙잡혀 그 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받았으며, 그는 곧바로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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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리3.1운동 만세시위지
고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의왕면 고천리 주민 80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광주군 의왕면 고천리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31일 밤 고천리에서 800여 주민이 만세시위를 펼치면서 시작되었다. 의왕면과 인근 주민은 지지대 고개에서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리고 만세를 높이 부르며 의왕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를 둘러싸고 만세를 외쳤다.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며 이날 2명이 총상을 입고 46명의 주민이 체포되어 즉결 태형을 맞았는데 걷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고 한다. 시위에 참여했던 인물로는 이봉근·성주복(1894-1971)·이복길 등이 있다. 성주복(1894~1971)은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5일 오전 8시경, 남대문역 앞에는 학생들의 주도로 수많은 시위군중이 모였다. 주도자인 강기덕과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을 크게 쓴 깃발을 휘두르며 달려와 제2회 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선포하였다. 시위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선두에 선 강기덕과 김원벽 등의 지휘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였다. 남대문에 이르렀을 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검거하자, 시위대는 일경의 제지를 피하여 1대는 남대문시장으로부터 조선은행 앞을 거쳐 보신각으로 향하고, 1대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과 무교정을 지나 종로 보신각 앞에서 시위대와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당시 성주복은 배재고보 4학년으로서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남대문역 일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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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복 묘
성주복(1894 - 1971)은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는데, 당시 배재고보 4학년으로서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남대문역 일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05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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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집 터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박사(1896 - 1989)는 1932년 조선어학회 간사였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으로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서울시 교육위원회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71년에는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학술 저서로는 역대 조선문학정화국어학논고, 국문학연구초, 국어학개설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박꽃, 심장의 파편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벙어리 냉가슴, 딸깍발이 등 다수가 있다. 또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란 요약 자서전이 있다. 1948년에 역대국문학전집, 1981년에 국어대사전을 편저했다. 이희승 박사는 1989년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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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리3.1운동 만세시위지
금오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양주군 시둔면(현 의정부시)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5일에 윤원세와 이윤의 등은 금오리를 중심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금오리 사거리에서 군청과 면사무소 등이 있는 의정부리로 행진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로 해산되었다. 이후 윤원세는 1936년에 전국멸왜기도집회에서 독립 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38년 4월에 황해도 신천에서 열린 천도교 특별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4월 25일에 귀가하였으나, 후유증으로 5월 2일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원세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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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리 만세터 표지석
3.1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난 다음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잇따라 만세운동이 일어나서 들불처럼 번져갈 때 이곳 양주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5일 천도교 양주교구장 윤원세 선생은 이윤의 등과 함께 금오리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만세시위는 금오네거리에서 시작하여 양주군청과 시둔면사무소 등이 있던 의정부리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경찰들의 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3월29일 밤에 금오리 인근의 자일리에서 조금호 선생 등 30여명의 주민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고, 부근 동리들에서는 봉화를 올리며 횃불 시위를 벌이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다. 현재 의정부시 금오동 금오사거리에는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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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추모비
독립투사 추모비는 동풍신을 비롯한 동창률, 동민수, 동석기, 동주원, 동명옥, 동상엽 등 7분의 광천동씨 애국지사의 추모비이다. 동풍신은 1919년 3월 15일의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7세의 나이에 옥중 순국하였으며,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 동민수 역시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왜헌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동풍신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 동민수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동창률은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활동 및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의 배포, 의친왕의 상해 망명 추진 등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고, 동석기는 1919년 3월 1일 목사로서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아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동주원은 경성의전 재학 중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동명옥은 1919년 3월 10일 단천 천주교인 독립선포식에 참가하여 만세 고창 주도하다 함흥형무소에 수감 실형선고를 받았다. 동상엽은 어업으로 재산을 축적하여 연해주 지방을 근거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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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세 추모비
면암 윤원세(1890 - 1939)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6년부터 천도교 의정부 교구장으로서 천도교당 내 야학당을 운영하면서 농촌 청소년과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던 중 1919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3월 15일 금오리에서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의정부로 진출하려다 일경에 저지되었다. 1923년 11월 27일 금오청년회와 부인회를 조직하여 농촌진흥을 위해 활동하였고, 1936년 8월 14일에는 멸왜기도(滅倭祈禱)와 특별모금운동을 벌였다. 1938년 4월 황해도 신천에서 열린 천도교 전국교구장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4월 25일 신천 경찰서원 2명에게 이끌려서 귀가하였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39년 5월 2일 사망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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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세 공적기념비
1919년 3월 15일 의정부 금오동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면암 윤원세(1890 - 1939)는 1916년 천도교 의정부 지역교구장으로 야학당을 설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 생도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1936년 8월 14일 멸왜기도와 특별모금 운동을 벌이며 지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4월 천도교 전국교구장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고문 후유증이 악화되면서 1939년 5월 2일 만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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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세 애향공적비
면암 윤원세(1890 - 1939)는 1890년 11월 7일 의정부 금오동에 태어나 1916년 천도교 의정부 지역교구장으로 야학당을 설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 생도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천도교구장으로 1919년 3월 15일 의정부 금오리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36년 8월 14일 멸왜기도와 특별모금 운동을 벌이며 지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4월 천도교 전국교구장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고문의 여독으로 만 4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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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선열의 유훈)
3.1운동기념비는 만세를 하는 손을 태극기가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3.1운동의 정신을 형상화하였으며, 기념비 하단에는 선열의 유훈과 광복회 의정부시지회 애국지사 66인 명단, 그리고 대한민국 독립운동 주요 연표가 새겨져 있다. 2015년 조국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의 명예 선양과 무관심속에 잊혀진 역사의 현장을 되살리고, 일제 침략에 항거한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후대에게 널리 일깨우기 위하여 광복회 경기도지부 의정부시지회에서 건립하였으며, 의정부 평화통일 테마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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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구정서 순국추모비
구연영(1864 - 1907)은 이천의 의병장이며 기독교전도사이자 애국계몽운동가로, 1896년 1월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중군장이 되어 이천시 광현(廣峴- 넓고개) 전투와 남한산성 전투 등을 비롯한 을미의병항쟁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기독교 선교활동 및 애국계몽 활동을 하다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밀고로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구정서와 함께 총살당하였다. 구정서는 구연영의 장남으로,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복음전파에 힘썼으며, 보안회·자강회 회원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낙향하여 구국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원주·여주 등지에서 의병지도자들과 항일운동을 꾀하였으며 일진회의 밀고로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