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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의병 교전지
정주원(1870~1925)은 경기도 죽산 출신이다.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한국군마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그저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주원은 8월에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하사리에서 자진하여 의병에 투신하여 30여 명의 동지를 이끌고 양지·양성군을 중심으로 의병 모집에 힘썼고 동지 150여 명을 규합할 수 있었다. 아울러 총기·탄약 등 무장을 갖추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각 부서를 정하고 거병하였다. 9월 이후 죽산·양지 등지에서 의병장 임옥녀 부대와 합진하고 의병 모집활동을 전개하여 부하 9백 여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정주원은 전 부대를 3부대로 나누어 자신은 그 중 1부대를 인솔하고 수원군 수하 방면에 출동하여 수원·안성·양지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나머지 2부대는 양지·죽산의 경계에 배치하여 활약하도록 하였다. 1908년 1월 의병 50명을 인솔하고 당진 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2월에 다시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죽산군 능촌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하였다. 4월 양지군 사동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며, 용인군 요봉골에서 적과 교전 끝에 부상자 1명을 내었다. 1908년 7월 19일 오전 8시경 충청도 해미군 적서촌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추격 당하던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9월 29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11월 24일 종신유형으로 감형되어 충남 당진에서 은둔하다가 1925년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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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옥 집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출신 오희옥(비공개 - 생존)의 집안은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 명문가」로, 할아버지는 오인수 의병장, 아버지는 오광선 광복군 장군, 어머니 정현숙과 언니 오희영은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만주에서 태어난 오희옥은 언니 오희영과 함께 1934년 중국 류저우(柳州)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첩보 수집을 하고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등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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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선 집(용인독립운동유적)
오의선(1889 - 1931)은 1889년 태어나 메이지(明治) 대학 중 1919년 2월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독립자금 모금을 한 흥화실업은행의 주식 모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으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가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5월 6일 옥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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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선 집 터
오광선(1896 - 1967)은 1896년 죽능리 어현에서 정철화 의병의 중군장으로 활약한 오인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만주로 건너가 1918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교관과 서로군정서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청산리대첩 후에는 대한독립군단에서 활동을 했으며 자유시 참변 후에는 이청천 장군과 함께 한국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김구의 주도하에 중국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별반 교도관으로 역임했다. 1940년 1월 베이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광복군 국내지대장으로 활동했다. 1967년 5월 작고하였다. 1962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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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묘
김석진(1847 - 1910)이 안장된 묘역이다. 1905년 11월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 반대투쟁과 파기운동을 벌이다 자결·순국하자 김석진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여, 1906년 1월 22일 상소를 올려 을사5적 처단과 협박에 의한 을사늑약을 공법상 무효임을 주장하였다. 이어 매국노들과 같이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열에 설 수 없다는 소를 올리고 의효전향관 자리를 물러났다. 1910년 한일병탄 후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그를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현 서울시 번동의 창녕위궁 재사(昌寧尉宮 齋舍)에서 순국·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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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성 묘
최윤성(1893 - 1945)은 황해도 봉산(鳳山) 사람으로, 1919년 3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인쇄하여 배부하고 피신하였다고 한다. 1920년 1월 황해도 평산군에서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의 목적하에 등사기로 군사공채모집 취지서와 통지서 60여 부 작성 및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0년 4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11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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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지 굴암사(용덕사)
이곳은 구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항쟁과 일제강점기 3.1만세독립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굴암사로도 불리운다. 옥여 임경재(任璟宰, 미상~1907) 의병장은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정국을 개탄하고 동년 7월, 당시 이천군 신면(新面,) 남정동(南井洞)의 이근풍의 집에서 주창용, 신규희, 조상현 등과 봉기할 것을 결의하여 포군 32명을 모집하고 의병대를 편제했다. 광주군 되고개에 이르러 김봉기를 대장으로 하여 장두지(獐頭地:또는 노루목)에서 일본 기병대를 격퇴하였다. 이어 이천, 광주, 용인,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이천읍 우편소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용인의 굴암사(현 용덕사)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용인 최초의 3.1운동은 원삼면 좌전고개에서 시작되었다. 좌항일, 가좌리, 사암리, 맹리, 문촌리 등지의 면사무소에 집결한 주민 수백 명은 백암으로 이동하다가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산되었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특히 3월 23일 용덕사 승려들은 독립선언서를 마을에 배포,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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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100년전 1919년 용인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3·1운동을 전개했다. 3월 21일 원삼면 좌항리를 시작으로 용인시 곳곳에서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일어난 만세운동은 원삼면· 이동면· 모현면· 내사면· 수지면· 읍삼면· 기흥면· 외사면· 남사면· 수여면 등 용인 전 지역에서, 주민· 학생· 스님· 기독교인· 천도교인 등 직업,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나서서 일으킨 운동이었다. 이때 참가한 인원은 1만32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이동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이동면 주민 2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1일에 용인군 송전리 삼거리에 있는 이동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놀란 송전리 주재 헌병들이 출동하자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송전리 이동파출소 앞 게시판 옆에 이 운동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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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이한응 묘)
이한응(1874 - 1905)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순국지사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 졸업 후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조병세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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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숙 집
정현숙(이명 정정산)(1900 - 1992)은 결혼 후 부군인 오광선을 따라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오광선이 신흥무관학교와 한국독립군 등에서 대일 항전을 벌일 때 정현숙은 독립군 활동을 배후에서 도왔으며, 1936년 부군이 피체된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요인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한국여성동맹 맹원으로도 활동하며 오희영·희옥 두 딸을 광복군으로 길러낸 여성독립운동가의 전형을 보여준 정현숙은 오인수 의병장으로부터 시작된 「용인 3대 독립운동가문」 일원으로 만족과 향토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95년 정부에서는 정현숙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2020년 4월에는 오광선과 함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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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엽 묘
홍종엽(1899 - 1983)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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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홍종엽 집
1919년 3월 28일 홍종욱(1892 - 1968)·홍종엽(1899 - 1983) 형제는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두 형제는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두 형제는 권종목과 더불어 포곡면 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각각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았다. 홍종욱(1892 - 1968)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동생 홍종엽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해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시위 행진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홍종엽(1899 - 1983)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