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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
공북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3일 여주군 북내면 주민 8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4월초 여주군 북내면에서는 천송리와 당우리의 공북학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특히 당우리의 공북학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짧은 기간에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진행되었다.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이던 이원기, 원필희, 이원문 등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여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4월 1일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이원기가 작성한 경고문을 이원문의 집에 모여 필사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4월 2일 이원기의 집과 4월 3일 장암리 구장 원도기 집에서 각각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 장암리와 현암리, 덕산리, 외룡리 등의 주민 800여 명이 당우리 공북학교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여주 읍내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오학리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시위군중이 오학리를 지날 무렵 일제의 발포로 시위대열은 해산되었다. 이원기(1900~1968), 최영무(1885~1952), 강두영(1898~1960), 김학수(1900~미상), 조경호(1901~1942), 이원문(1901~1968), 원필희(1896~1968)는 경기도 여주 사람으로 북내면 당우리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다.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여주 지역은 호응하지 않아 서울사람으로부터 무시 당하자 분개한 이원기는 4월 1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하여, 4월 5일 여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이원기, 원필희, 이원문, 조경호는 이원문의 집에서 만나, 독립선언서를 참고하여 42매의 경고문을 작성하여 이 날 인근지역에 배부하였다.4월 2일에는 이원기의 집에서 강영조, 김학수, 이원문과 다시 만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3일 장암리 이장 원도기의 집에서 김학수, 원필희, 이원기 등이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최영무, 강두영, 강만길, 최명용 등이 이웃 동리인 현암리 주민들로부터 빨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해달라는 독촉을 받았다고 하자 거사일자를 앞당기기로 결의하였다. 급히 마을주민들을 독려하여 북내면 당우리공북학교로 향한 이들은 현암리, 장암리, 덕산리, 와룡리 등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을 규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배포한 후, 당우리의 공북학교에 모인 8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 해 7월 31일 이원기는 징역 1년형, 최영무는 징역 1년 6개월형, 강두영, 김학수는 징역 8개월형, 조경호, 이원문은 태 90도, 원필희는 7월 13일 징역 8개월형을 최종적으로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이원기, 최영무, 원필희에게, 2018년에 조경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했고, 1980년에 최영무에게, 1983년에 이원기에게, 1992년에 강두영과 이원문에게, 2019년에 조경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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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집
이인영(1868 - 1909)은 대한제국 말의 의병장으로서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 500명을 이끌고 춘천과 양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양주에서 13도창의군 총대장으로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공략할 계획으로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허위를 후임으로 삼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상주에 은신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잡혀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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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필희 집
원필희(1896 - 1968)는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경성농림학교 학생으로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에 거주하였으며,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본래 손병희(孫秉熙)를 따랐던 그는 여주군의 독립만세운동 책임자로서 군내 각 면으로 돌아다니면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도록 계몽하였는데, 1919년 4월 5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동지들과 같이 협의한 후 북내면 국민학교에서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를 들고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 하다가 일헌병에 붙잡혔다. 그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7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여독으로 요추 및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로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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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필희 묘
원필희(1896 - 1968)는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경성농림학교(京城農業學校) 학생으로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北內面 長岩里)에 거주하였으며,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본래 손병희(孫秉熙)를 따랐던 그는 여주군의 독립만세운동 책임자로서 군내 각 면으로 돌아다니면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도록 계몽하였는데, 1919년 4월 5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동지들과 같이 협의한 후 북내면 국민학교에서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를 들고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 하다가 일헌병에 붙잡혀서 이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7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여독으로 요추 및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로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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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식 영세불망비
홍만식(1842 - 1905)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며 초대 우정국 총판을 지낸 홍영식의 형으로, 1866년(고종 3)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하여, 수찬(修撰)과 검열(檢閱)을 지내고 여주 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자살하여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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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리 의병 전투지
마전리 의병 전투지는 1907년 11월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07년 11월 8일 오전 10시경 헌병 18명이 수비하고 있던 마전 서남쪽 두일성 천신면에 의병 약 1,000명이 마전읍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마전 일제 헌병분견소는 그 이전에 마전 부근에 있는 약 1,000명의 의병이 8일 밤 또는 9일 새벽에 마전읍내에 내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철원헌병분견소에 급하게 증원을 요청하였다. 철원헌병분견소의 중위 태전청송(太田淸松, 오오타 기요마츠)은 부하 20명과 철원수비대의 하사 5명을 인솔하여 9일 오전 7시에 급히 마전으로 향하였고, 김화수비대에서 파견된 일본군이 후방에서 의병을 공격하였다. 의병은 고전 끝에 약 2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의병들이 다시 마전을 습격할 기미를 보이자 일본군은 하사 이하 19명을 잔류시켜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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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향교 3.1운동 만세 시위지
마전향교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1~22일 연천군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1일 밤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장터 만세시위를 지휘하던 조우식·정현수 등은 2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로 향하였다. 한편 백천기는 백학면 통구리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민 60여 명을 모아 만세를 부르면서 미산면 마전향교 앞에 이르러 두일리에서 행진해 오는 주민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22일 새벽 3-4시경 마전향교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렀고, 오후에 약 300명의 군중이 마전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떠나 미산면 석장리로 가는 도중 마전경찰관주재소 앞에서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22명이 체포, 오후 4시경에 해산되었다. 조우식(미상~미상), 정현수(1899~1951), 이낙주(1896~1923), 홍순겸(1892~1953), 한상혁(1877~미상), 김문유(1894~미상), 구금룡(1896~미상), 김복동(1889~미상), 백천기(1880~1951)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조우식은 장날인 21일 두일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구금룡이 동지를 포섭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21일 시장으로 간 조우식은 구금룡에게 소방용 경종을 울려 장꾼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장꾼들이 모여들자 조우식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때 정현수는 인근 동리의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렇게 하여 모인 다수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몰려 들어갔다.정현수와 이낙주는 백학면장을 데려와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 한상혁 등은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가서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모두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이 응하지 않자, 군중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이들은 제지하는 헌병을 뿌리치고 시위를 계속하며 미산면 마전리로 행진하였다. 마전리에서 태극기를 만든 조우식, 홍순겸 등은 향교로 가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통구리에서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60여명의 주민들을 규합하던 백천기는 두일리에서 행진해 오는 주민들과 합세하였고, 시위 후 결국 이들은 체포되고 만다. 1919년 7월 7일 정현수는 징역 2년, 구금룡, 이낙주는 징역 1년 6월, 김복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9월 18일에 조우식은 징역 3년, 홍순겸, 한상혁, 김문유는 징역 1년 6월, 백천기는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에게, 1995년 구금룡에게, 2011년에 조우식, 한상혁에게, 2016년 김복동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홍순겸에게, 1985년 이낙주에게, 1992년 백천기에게 추서했고, 2013년 김문유에게는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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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종 집 터
의병장 왕회종(1879 - 1925)은 숭의전 참봉으로 근무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금성, 토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함경도 길주, 명천, 혜산진까지 북상하였다. 또한 1907년의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때에도 조인환, 권준, 김진묵 등과 함께 의병 부대를 지휘하며 양주, 파주, 적성, 철원, 춘천, 양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에 13도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 교육에 힘쓰다가 의병 전쟁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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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연천 항일운동 기념탑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백학면 두일리 장터에서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킨 선열들을 기리고 관내 학생들에게 역사의식 고취 및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평화관광교육관 부지 내에 2008년 8월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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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일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두일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1일 두일리 장날에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1일은 두일리 장날로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구금룡 등의 주도로 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정현수는 면장 윤규영(尹圭榮)에게 같이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고, 인근 집의 문을 돌로 두드리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라”고 독려하였다. 또한, 구금룡은 소방용 경종을 쳐 100여 명의 군중을 집합시켰다. 이어 이들은 시장 부근의 백학면사무소로 몰려가서 직원들에게 독립만세를 같이 부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호응하지 않자 정현수는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기물을 파괴하였다. 조우식(미상~미상), 정현수(1899~1951), 이낙주(1896~1923), 홍순겸(1892~1953), 한상혁(1877~미상), 김문유(1894~미상), 구금룡(1896~미상), 김복동(1889~미상), 백천기(1880~1951)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조우식은 장날인 21일 두일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구금룡이 동지를 포섭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21일 시장으로 간 조우식은 구금룡에게 소방용 경종을 울려 장꾼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장꾼들이 모여들자 조우식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때 정현수는 인근 동리의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렇게 하여 모인 다수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몰려 들어갔다.정현수와 이낙주는 백학면장을 데려와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 한상혁 등은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가서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모두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이 응하지 않자, 군중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이들은 제지하는 헌병을 뿌리치고 시위를 계속하며 미산면 마전리로 행진하였다. 마전리에서 태극기를 만든 조우식, 홍순겸 등은 향교로 가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통구리에서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60여명의 주민들을 규합하던 백천기는 두일리에서 행진해 오는 주민들과 합세하였고, 시위 후 결국 이들은 체포되고 만다. 1919년 7월 7일 정현수는 징역 2년, 구금룡, 이낙주는 징역 1년 6월, 김복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9월 18일에 조우식은 징역 3년, 홍순겸, 한상혁, 김문유는 징역 1년 6월, 백천기는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에게, 1995년 구금룡에게, 2011년에 조우식, 한상혁에게, 2016년 김복동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홍순겸에게, 1985년 이낙주에게, 1992년 백천기에게 추서했고, 2013년 김문유에게는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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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사 의병 주둔지
심원사 의병 주둔지는 1907년 연천 및 철원 지역의 의병이 주요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전투를 전개한 사찰이다. 1907년 9월 25일 의병 800여 명이 철원 심원사에 주둔하자 정보를 입수한 일제 김화수비대는 26일 밤에 심원사 일대 각 방면을 포위한 채 공격하였다. 26~27일에 걸쳐 의병들은 27일 오전 3시에 법화동 전투, 오후 3시에 대광리 전투를 벌였는데, 화력의 열세로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심원사에 있던 의병 300여 명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의병의 은거지인 심원사에 불을 질러 전소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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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5위 위령비
항일의병 5위 위령비는 1907년 9월 27일 보개산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의병진 250여 명이 일본군 김화 수비대 재경보병 50연대 1소대와 치열하게 항쟁하다가 순국한 무명의 항일의병 5인의 주검을 대광리 주민들이 수습해 마을 뒤 야산에 묻고, 연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가 1997년 마을에서 구전으로 전해져온 의병 묘 5기에 대한 검증에 나서 밤나무를 통째 깎아 만든 관과 유골을 확인한 뒤 2000년 11월에 세운 것이다. 보개산 일대는 조선 군대가 강제 해산된 1907~8년 허위, 연기우 등이 이끈 수백 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연천군은 2012년에 신서면 대광리에 있던 무연고 의병 묘 9기와 함께 위령비를 항일의병 투쟁의 본산인 심원사 부근인 신서면 내산리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