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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양서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1919년 3월 30일, 4월 1~2일 양평군 양서면 주민 2,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0일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약 13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1일에는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양서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는 전날 강하면 만세시위에도 참여했던 최대현도 참가하였다. 다음날인 4월 2일에도 여운긍, 여광현 등이 선도하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4월 3일 인근 4개 면민 4,000여 명이 참여한 고읍면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여광현(1886~1962)은, 경기도 양평 신원 출신으로, 1919년 3월 31일 오후 11시에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는 밤을 새워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4월 1일 이웃 양서면 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에도 고읍면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고읍면 주민뿐 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한 시위 군중이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여광현은 이들과 함께 양근읍으로 향했다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최대현(1852~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강하·양서·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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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집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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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광현 묘
여광현(1886 - 1962)은, 경기도 양평(楊平) 신원 출신으로, 1919년 3월 31일 오후 11시에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는 밤을 새워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4월 1일 이웃 양서면(楊西面) 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에도 고읍면(古邑面)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고읍면 주민뿐 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한 시위 군중이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여광현은 이들과 함께 양근읍으로 향했다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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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불망 대한독립운동 참전공적비
1891년 양서면 청계리에서 출생한 이기정과 1890년 양서면 증동리에서 출생한 어영해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소속돼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며, 3·1운동을 얼마 앞둔 1919년 초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아 고향인 양평에 행동대원으로 파견됐다. 양서면이 고향인 두 사람은 당시 양평 주민들에게 조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일제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했으며, 1919년 3·1운동 당일에는 주민들을 모아 면사무소(현재 양평읍 소재)를 습격하는 거사를 감행하였다가, 선두에 섰던 이기정 선생은 무장한 일본 헌병대의 총격에 의해 총알이 우측 허벅지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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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룡 집
이승룡(1853 - 1896)은 경기도 양근(楊根, 현 楊平) 사람으로서, 의병장으로 경기도 남한산성에서 활동하였다. 일제가 1894년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이승룡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1896년 초 경기도 양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입성하여 항전하다가 일본군의 꾀임에 빠져 남한산성을 나왔다가 붙잡혀 동년 음력 2월 14일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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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터 표지석
양평읍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4일 양평군 양평읍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양평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경기도 내에서 규모뿐만 아니라 시위 양상도 매우 격렬하였다. 3월 초부터 4월까지 장기간 지속된 만세운동은 격렬한 시위로 전개되어 피검자 및 중형을 선고받은 인사도 많았다. 1919년 3월 24일 연희전문학교 서기 이신규가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의 큰 길에서 독립에 대한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날이었던 이날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으며, 이신규의 연설과 함께 격문을 보여주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시위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오후 2시경 일본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이끌던 이신규와 곽영준을 주동자로 체포하자 시위군중은 크게 격분하여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면사무소, 우편소 앞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군청으로 몰려가 국세철·세금정리부 등을 파기하였다. 갈산면 시위의 주동자인 곽영준, 한창호, 김경성, 서상석, 김석봉, 한봉철 등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2년형, 10월형, 8월형, 6월형 등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신규(1899~1926)는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곽영준(1899~1932), 김경성(1888~1950), 한봉철(1898~1936)은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중을 이끌었다. 양근 지역의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로 재직하고 있던 이신규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1919년 3월 24일 이곳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하였다. 3월 24일은 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곽영준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했고, 이신규는 길가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성은 이 날 오후 3시 경에는 양근리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요구하였다. 시위 직후 이들은 체포됐고, 7월 9일에 김경성은 징역 6월, 곽영준은 징역 8월, 한봉철은 징역 10월, 이신규는 10월 23일에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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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읍 3.1운동 만세시위지
양평읍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4일 양평군 양평읍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양평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경기도 내에서 규모뿐만 아니라 시위 양상도 매우 격렬하였다. 3월 초부터 4월까지 장기간 지속된 만세운동은 격렬한 시위로 전개되어 피검자 및 중형을 선고받은 인사도 많았다. 1919년 3월 24일 연희전문학교 서기 이신규가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의 큰 길에서 독립을 달성하자는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날이었던 이날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으며, 이신규의 연설과 함께 격문을 보여주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시위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오후 2시경 일본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이끌던 이신규와 곽영준을 주동자로 체포하자 시위군중은 크게 격분하여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면사무소, 우편소 앞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군청으로 몰려가 국세철, 세금정리부 등을 파기하였다. 갈산면 시위의 주동자인 곽영준, 한창호, 김경성, 서상석, 김석봉, 한봉철 등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2년형, 10월형, 8월형, 6월형 등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신규(1899~1926)는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곽영준(1899~1932), 김경성(1888~1950), 한봉철(1898~1936)은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중을 이끌었다. 양근 지역의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로 재직하고 있던 이신규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1919년 3월 24일 이곳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하였다. 3월 24일은 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곽영준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했고, 이신규는 길가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성은 이 날 오후 3시 경에는 양근리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요구하였다. 시위 직후 이들은 체포됐고, 7월 9일에 김경성은 징역 6월, 곽영준은 징역 8월, 한봉철은 징역 10월, 이신규는 10월 23일에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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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읍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이 고장에서 있었던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터에 안내판을 세운 것이다. 고읍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는 고읍면·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 4개 면민 4,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 일어난 고읍면(현 옥천면) 만세 시위에는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였다. 강하면과 양서면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윤기영·이보원·신우균 등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고읍면사무소 앞에 모인 시위대가 양근 읍내를 향하여 행진할 것을 제의하자 최대현은 군중을 인솔하고 응암리와 용암리 사이 언덕까지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로 인해 최대현은 징역 6개월에 벌금 20원, 윤기영·이보원·신우균은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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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 전투지(사나사)
1907년 10월 양평의병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10월 27일 일본군 보병 제13사단 예하 51연대 제11중대와 사나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사나사는 이때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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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룡 묘
이승룡(1853 - 1896)은 경기도 양근(楊根, 현 楊平) 출신의 의병장으로, 일제가 1894년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 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 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국권 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1896년 초 경기도 양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입성하여 항전하다가 일본군의 꼬임에 빠져 남한산성을 나왔다가 붙잡혀 동년 음력 2월 14일 피살, 순국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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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년 묘
이연년(1874 - 1944)은 경기 양평(楊平) 사람으로, 1907년 7월 포수 30여 명과 함께 김춘수의진(金春洙義陣)에 참여하여 종사(從事)가 되어 의병 200여 명을 인솔하여 지평·양근·홍천 등지에서 왜적과 전투하였고, 황경평에서 의병 모집을 위한 전령문 작성 및 대송면 곡수에서 일본 순사를 살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08년 3월에 일본 수비대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었다. 1908년 5월 22일에 평리원(平理院)에서 소위 내란죄로 유배 10년 형을 받고 완도(莞島)에서 유배 생활을 하셨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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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기념비
양평의병기념비는 한말 전후기 의병의 요람인 양근과 지평이 통합된 양평의병으로 정립하고, 광복 70주년 및 을미의병 창의 120주년에 즈음하여 숭고한 창의호국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2012년 을미 12월 28일에 양평의병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비로, 양평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2,000여 분 중 밝혀진 의병 200여 분의 성명을 돌에 새겼다. 용문산관광지 친환경농업박물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 화서연원독립운동기념비, 용문항일투쟁기념비 등과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