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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서종면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10일에 양평군 서종면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양평의 3.1운동은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처음 만세 시위가 발생한 이래 약 한 달에 걸쳐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졌다. 1919년 3월 10일에 백낙기, 최학순 등이 주민들에게 문호리 장날에 문상학교(현 문호초등학교)로 모이라는 내용의 통문을 비밀리에 돌렸다. 통문을 받은 주민 수백 명은 문호리 장날에 모여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날이 저물도록 행진을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주민 여러 명을 체포하였다. 최학순은 양주 헌병대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수백 명이 참가한 문호리 시위는 천주교인들이 주도하여 천주교를 전국으로 전파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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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 묘
김영일(이명 김영조)(1896 - 1979)는 1919년 3월 1일 경기도 양평읍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는데, 정배리의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거사 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 당일 3월 1일 새벽에 양평읍 내에 도착하여 정오쯤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주고 시위군중의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나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과 저지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 일로 양주헌병분견소에 붙잡혀 1919년 5월 5일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3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8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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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영 묘
김교영(1858 - 1929)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광주군 동부면(東部面) 망월리(望月里) 구장으로 재직하던 중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뒤, 같은 달 27일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인솔 후 동부면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혔다. 그해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소재하고 있던 묘소가 현 위치인 양평군 양동면 금왕리로 이장되었으며, 묘소 앞에는 2004년에 세운 공적비가 있다. 이 공적비도 묘소가 이전됨에 따라 함께 이전되었다.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김교영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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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고장 양동 표지석
양동은 ‘을미의병’의 발상지로, ‘지평의병’을 대표하는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김백선(金佰善) 등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킨 후,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치고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의병장들인데 그들 모두 양동면 출신이다. 석곡리는 의병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석곡리 사이실마을에는 양평 의병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의병의 고장 양동을 알리기 위해 2002년 10월 28일 을미의병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에서 본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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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 삼산리 전투터 표지석
정미의병 삼산리 전투터 표지석은 1907년 11월 7~8일 정미의병이 활동했던 곳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 체결과 군대 해산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장 이인영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2천여 병력을 이끌고 삼산리에 본부를 두었다. 양동면 일원에 5천여 명의 의병이 집결하자 11월 7~8일 일본군 토벌대가 공격해왔고, 격렬한 전투로 인해 수많은 의병이 희생되었다. 이인영(1868 - 1909)은 대한제국 말의 의병장으로서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 500명을 이끌고 춘천과 양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양주에서 13도창의군 총대장으로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공략할 계획으로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허위를 후임으로 삼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상주에 은신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잡혀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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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영 묘
이춘영(1868 - 1896)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으로,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김백선을 만나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안승우와 함께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원주·제천·단양·충주성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수안보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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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영 집
이춘영(1868 - 1896)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으로,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김백선을 만나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안승우와 함께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원주·제천·단양·충주성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수안보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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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우 집
안승우(1865 - 1896)는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이다. 을미년(1895) 말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에서 이춘영, 김백선과 함께 지평의병을 일으켜 제천, 충주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천의 남산성 전투에서 비가 와서 주 무기인 화승총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접전하다가 결국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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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4월 7일 양동면사무소 광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3,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펼쳐 3.1운동을 확산시킨 선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양평문화원 양동분원과 양평을미의병정신 현창회에서 2013년 11월 세운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높이 4.5m 크기이며, ‘사생취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양동 역사 만들기 추진위원회에서 건립했다. 양동만세공원(석곡리 418-3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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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양동만세공원)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마을은 안종응, 안승우,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화서학파가 위정척사사상을 기반으로 창의 호국투쟁을 처음 논의한 곳인 양평군 양동면은 명실상부한 1895년 을미의병(지평의병) 발상지로서, 한국 근대 항일민족운동 50년 현대사의 시발점이라는데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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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사이실 마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마을은 안종응, 안승우,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이춘영과 김백선은 현재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 안승우 생가에서 안종응과 함께 양평의병을 창의하기로 하고, 안창에서 최초 의병이 집결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쳤다. 양평 을미의병(지평의병) 발상지 사이실마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김백선(1873 - 1896), 안승우(1865 - 1896), 이춘영(1868 - 1896)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안승우의 아버지인 안종응은 의병부대의 실질적 후원자로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안승우의 아들 안기영(1884 - 1920) 역시 을미의병 당시 제천의진의 중군장으로서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1962년 안승우에게, 1991년 김백선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건국훈장 독립장을 1963년 이춘영에게, 대통령표창을 1968년 김백선에게, 건국포장을 1999년 안종응과 안기영에게 추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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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우 묘
안승우(1865 - 1896)는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으로, 을미년(1895) 말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에서 이춘영·김백선과 함께 지평의병을 일으켜 제천·충주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천의 남산성 전투에서 비가 와서 주 무기인 화승총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접전하다가 결국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