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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백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백석면 주민 6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7일 밤, 백석면 연곡리 구장이던 안종규와 그의 형 안종태가 주도하여 연곡리에서 주민 20~30명과 함께 횃불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이들 형제는 이사범·김대현·조필선 등과 더불어 600여 명의 주민을 인솔하여 오산리 대들벌로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이후 다시 백석면사무소 앞으로 진출하여 시위를 계속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안종규는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그의 형 안종태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출옥하였으나,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이사범·김대현·조필선 등은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안종규(1889~1946)와 안종태(1882~1920)은 경기도 양주 사람이다.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이장인 안종규는 1919년 3월 초순 민족대표들이 조선독립선언을 하자 이에 찬동하여 양주군 백석면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3월 27일 친형인 안종태와 함께 다수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어 3월 28일에도 안종태·이사범·조필선 등과 함께 동면 오산리 속칭 대들벌 들판에서 인근 주민 600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면사무소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5월 23일 두 형제는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는 안종태에게 1993년에 안종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이사범(1878~1943), 김대현(1872~미상), 조필선(1888~1965) 모두 1919년 3월 27일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서 안종규와 안종태와 함께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6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백석면 오산리 들판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백석면사무소까지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사범, 김대현, 조필선 모두 징역 6월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는 조필선에게, 1993년에는 이사범에게, 2010년에는 김대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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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정용대 연합의병전투지
이은찬(1878 - 1909)은 원주 부흥사면(현, 판부면) 출신의 한말 의병장으로,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9월 원주에서 해산군인 등 500명의 의병을 모은 뒤 경북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 모집에 진력하여 경기도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이 13도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를 편성하고 서울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 소속부대원과 함께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간도지방으로 항일운동의 거점을 옮겨 군사를 양성하고자 하였으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 밀정에 의해 1909년 3월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해 6월 27일에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용대(1882 - 1910)는 대한제국기에 적성, 풍덕, 김포, 통진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한국 군대 강제해산에 대한 의분으로 1908년 2월 향리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이 되어 적성·풍덕·김포·통진 등지에서 병력을 지휘하였으며, 같은 해 2월 27일∼3월 2일에 일본 헌병대 및 경찰대와 교전을 하였고, 계속 김포와 적성 등지에서 군량미와 금품을 징발하면서 전투준비를 하다가 1909년 10월 28일 붙잡혔다.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1910년 순국하였다.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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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 묘
이순재(1891 - 1944)는 1919년 3월 29일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의 승려로서 김석로·김성암 등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그 준비로써 독립시위에 대한 격문 200여 매를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 명의로 인쇄하여 인근 각 동민에게 배포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고, 동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아 동년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동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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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김순갑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장흥면(長興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 양주군에서도 곳곳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양주군 장흥면은 조그마한 산 속에 있으면서 옛날 서산(瑞山)이라는 곳으로, 이때에도 이씨 왕조시대의 환관(宦官)이 많이 살고 있어 양반과 상놈의 사회 신분계급이 오랫동안 존속했던 곳이다.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에서는 이회명(李會明) 등이 주동이 되어 시위가 진행되었다. 1919년 3월 28일 저녁 8시경에 동리 주점 앞에 수십명이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 29일에도 이른 아침에 동민들이 모이자 이회명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위행렬을 인도하여 장흥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여기에는 이미 3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이 군중의 주도 인물은 김순갑과 정윤삼(鄭允三)·김완순(金完順) 등이었다. 김순갑은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 있는 교현리 주민들의 선두에서서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면사무소 앞에서 이회명이 인솔한 집단과 합하여 시위대는 크게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 후 체포된 김순갑은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고, 1920년 2월 26일에 서대문감옥을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윤삼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장흥면(長興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 양주군 곳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양주군 장흥면(長興面)은 조그마한 산 속에 있으면서 옛날 서산(瑞山)이라는 곳으로, 이때에도 이씨 왕조시대의 환관(宦官)이 많이 살고 있어 양반과 상놈의 사회 신분계급이 오랫동안 존속했던 곳이다.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에서는 이회명(李會明) 등이 주동이 되어 시위가 진행되었다. 1919년 3월 28일 저녁 8시경에 동리 주점 앞에 수십명이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 29일에도 이른 아침에 동민들이 모이자 이회명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위행렬을 인도하여 장흥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3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이 군중의 주도 인물은 정윤삼과 김순갑(金順甲), 김완순(金完順) 등이었다. 정윤삼은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 있는 교현리 주민들의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 후 체포된 정윤삼은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했으나 8월 14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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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신도비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일제강점기에 YMCA 전국연합회 회장이자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이다.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으며, 민립대학설립위원회 위원장, 보이스카우트 총재, 민족유일당 운동인 신간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옥중에서 기독교와 인연을 맺고 그때부터 기독교적인 삶을 평생 실천하였다. 1927년 3월 29일 노환으로 서거하였으며, 10만 군중의 애도 속에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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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묘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1906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도왔으며, 191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총무로 YMCA 운동에 전념하면서 3.1독립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 연맹의 전신)의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으로 인재 양성은 물론 민족언론 문화창달에 힘썼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3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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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기 묘
정세기(1894 - 1981)는 경남 하동(河東)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 하동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수많은 장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같은 해 5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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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 의병 전투지
고동 의병 전투지는 1907년 11월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07년 11월 14일 의병들이 당시 장흥면 이패상리 고동에서 400m 정도 떨어진 고양 방향 북방고지 숲속에 매복하고 있었다. 양주경무서는 의병 130여 명이 내습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헌병분견소의 10여 명과 함께 고동으로 향했다. 당일 오후 5시경 고동으로부터 200m쯤 떨어진 지점에 도착한 토벌대(일본군)는 의병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여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2시간여에 걸친 치열한 전투 후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토벌대는 고동에서 숙영을 하였다. 의병들은 야음을 타서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다음날 오전 6시경 고동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매복하였다. 토벌대는 이를 탐지하고 다시 의병들을 공격하였다. 화력에서 열세인 의병들은 서쪽 고지를 넘어 파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2명이 죽고, 다수의 의병이 부상당하였다. 토벌대는 말 6필, 소 2필, 총 23정, 칼 1점 등을 노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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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묘
정현섭(1896 - 1981)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으로,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이다. 정화암(鄭華岩)이라고도 잘 알려져 있는데, ‘화암’은 중국에 건너가면서 부르게 된 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색공포단, 상해해방연맹, 중한청년연합회 등을 결성하여 무력 항일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다.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광복군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 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고, 광복 후 귀국해,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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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묘
김진우(1883 - 1950)는 강원도 영월 사람으로, 병장기 대신 붓을 들어 대나무를 강직하게 그려낸 항일 서화가(書畵家)였다. 12세에 항일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모시고 서간도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의병 전쟁을 치렀고,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을 지냈으며,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소집을 요구하는 문건 ‘아(我) 동포(同胞)에 고(告)함’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동년 9월 국내 활동을 위해 귀국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 신의주지청(新義州支廳)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4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하는 등 독립활동을 하였으나 해방 후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안타깝게 사망했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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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근 묘
안경근(1896 - 1978)은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1918년 사촌 형 안중근(安重根)이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상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金九)를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투구하였다. 노주군관학교와 운남군관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후, 만주에서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 상해에서 황포군관학교의 구대장,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한 군사 전문가로서, 재상해한국독립당대회에 참석하여 밀정 이종홍의 교살과 애국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특무대의 대원으로도 활약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김구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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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영 묘
윤기영(1871 - 1941)은 경기도 양평(楊平) 사람으로, 1919년 3월 31일 강하면, 4월 1일 양서면, 4월 3일 옥천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망국의 통한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 일로 인해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과 태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평생 병고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하였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