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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성 묘
원지성(1884 - 1933)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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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기념관
안성 3.1운동기념관은 3.1운동 당시 가장 극렬하게 만세항쟁을 펼쳤던 4.1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집결지였던 만세고개 일원에 건립된 기념관이다. 안성지역의 만세운동은 전국3대 실력 항쟁이라고 불릴만큼 거셌는데 당시 자료를 포함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물, 기록 등을 실물 모형 및 체험의 형태로 관람할 수 있다. 1989년 사료전시실을 건립한 것이 본 기념관의 전신으로 이후 2001년 무궁화동산을 준공하면서 광복사와 기념관을 개관했으며 2003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크게 로비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있다. 안성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11월부터 4월 3일까지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이다.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원주민들이 서울에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받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던 안성군 지역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안성군 독립운동가인 최은식, 이유석 등이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전래되어서 양성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우편소를 파괴하였으며 주재소와 사무소에 내걸렸던 일장기를 끌어내어서 불태우고 일본인 상점 등을 파괴하고 감옥에 갇힌 조선인들을 탈출시키는 2일간의 해방기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원과 안성 4개지역에 검거반을 파견하였고 약 800여명의 참여자들을 체포하고 276호의 가옥을 방화하였다. 그 결과 현장·옥중·부상 순국자가 26명이 발생하였고, 태형 41명, 177명이 투옥되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청년운동, 민족운동, 사회운동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0년 안성보통학교에서 야학을 개설하였으며 이후 청년운동,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한 무장투쟁을 전개해나가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안성지역 출신 중 김태원(죽산면 장계리 출신)과 유만수(금광면 개산리 출신) 등은 의열단, 대한애국청년당 등에 관여하였다. 또 1940년 광복군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안성지역 출신인 심광식(미양면 강덕리), 홍종윤(미양면 용두리), 박건배(고삼면 봉산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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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3.1운동기념탑
황해도 수안면, 평안북도 옥상면의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항쟁지였던 곳에, 1984년 4월 1일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원곡면에서 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원곡면 칠곡리 이종락 유족회원의 땅을 희사받아 건립했던 구(舊) 3.1운동기념탑이다. 2001년 11월 17일 만세고개에 안성3.1운동기념관 및 안성3.1기념탑(원곡-양성 3.1독립항쟁기념탑)을 건립하면서 구(舊) 3.1운동기념탑은 원곡면의 요청으로 기념탑 보수 및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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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묘
이병철(1894 - 1970)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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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화 활동근거지(칠장사)
정철화(1878 - 1943)는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의 항전이 격화되던 1907년 하반기에 유생 신분으로 거의(擧義)하였다.이후 안성군 이죽면 칠장사에서 30여 명의 소규모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안성·충주·청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서울 외곽에 은거하던 중, 1907년 9월 30일 체포되어 내란죄로 15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 뒤 1913년 9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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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유물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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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장 3.1운동 만세 시위지
군포장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시흥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군포장은 안양과 의왕, 군포의 경계지이자 상업적 요지였기 때문에, 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민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 군포와 안양 인근에서 모인 주민 2,000여 명은 군포장에서 시위를 전개한 뒤 군포장역 앞에 위치한 경찰주재소로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과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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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천, 이재현 추모상
안양 지역 출신의 항일 애국지사 우봉(牛峰) 이재천, 해평(海平) 이재현 형제 추모상이다. 우봉·해평 형제는 1913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 밑에서 독립활동을 펼쳤으며, 이재천은 지난 1935년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옥사하였고, 동생인 이재현은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과 함께 중국 상해와 홍콩 등에서 광복군으로 독립활동을 벌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항일 애국지사 이재천·이재현 형제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안양시 자유공원에 본 추모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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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의거지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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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집
이재현(1917~1997)은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이해평(李海平)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1939년 10월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국내정진군으로 베이징에서 교포를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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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의거비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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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부조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