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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수 묘
유익수(1870 - 1926)는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秀岩面 秀岩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인근 18개 동리 2,000여 명의 주민들을 인솔하고 선두에 서서 읍내의 향교·면사무소·보통학교 등을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튿날에는 수원군 반월면(水原郡半月面) 장터로 나아가 6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6년여를 병석에서 고생하다가 1926년 사망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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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수암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수암면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에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미 읍내의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윤병소와 김병권은 3월 29일 화정리에서 이봉구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대열에 참여하였다. 또한 월피리의 유익수는 수암면 성포리 주민 3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집 앞을 지나가자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면사무소 서쪽에 있는 도살장터에 모여 있다가 시장을 거쳐 비석거리에 집합하였다. 윤병소와 유익수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향교,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지를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편 와리의 홍순칠도 유익렬의 하인 임학신에게서 비석거리 집회 소식을 듣고 허치선의 집에 모인 30여 명을 인솔하여 비석거리 집회에 참가하였다. 윤동욱은 능곡리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이봉문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이장에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암면의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는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유익수(1870~1926), 김병권(1878~1951), 윤동욱(1891~1968), 홍순칠(1877~1932)는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윤병소(1887~1919)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 면내 18개 동리의 주민 2천여 명의 오전 10시에 비석거리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른 이들의 뒤를 시위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며 따랐고, 해산을 명령하는 일경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하였다. 읍내로 진입하여 경찰 주재소, 공립 보통학교, 면사무소, 향교를 돌며 군중을 지휘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였지만 결국 시위 후 체포된다. 유익수는 이 해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윤병소는 5월 27일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된다. 홍순칠은 5월 27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병권은 5월 27일 징역 6월을, 윤동욱은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동년 7월 31일 태 90도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는 윤병소에게, 1983년에는 유익수에게, 1992년에는 홍순칠에게, 1996년에는 윤동욱에게, 2006년에는 김병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한 1990년에는 유익수와 윤병소에게 유익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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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동 3.1운동기념탑(위대한 투쟁)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30일 안산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상록구 수암동 비석거리는 당시 수암면 인구의 4분의 1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수암동 비석거리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고 만세운동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그 인근의 독립운동에 나선 주민들이 집결했던 장소인 옛 수암주재소 터에 '수암동3·1운동기념탑'을 세웠다. 6.6m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기념탑이며, 안산 독립운동의 역사와 안산 3·1운동의 주역 13인의 이름이 안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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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거리 3.1운동기념비
비석거리는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에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미 읍내의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윤병소는 3월 29일 화정리에서 이봉구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대열에 참여하였다. 또한 월피리의 유익수는 수암면 성포리 주민 3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집 앞을 지나가자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면사무소 서쪽에 있는 도살장터에 모여 있다가 시장을 거쳐 비석거리에 집합하였다. 윤병소와 유익수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향교,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지를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편 와리의 홍순칠도 유익렬의 하인 임학신에게서 비석거리 집회 소식을 듣고 허치선의 집에 모인 30여 명을 인솔하여 비석거리 집회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수암면의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는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수암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익수는 징역 1년, 홍순칠은 징역 1년, 윤병소는 징역 10개월을 받았다. 유익수(1870~1926), 김병권(1878~1951), 윤동욱(1891~1968), 홍순칠(1877~1932)는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윤병소(1887~1919)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 면내 18개 동리의 주민 2천여 명의 오전 10시에 비석거리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른 이들의 뒤를 시위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며 따랐고, 해산을 명령하는 일경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하였다. 읍내로 진입하여 경찰 주재소, 공립 보통학교, 면사무소, 향교를 돌며 군중을 지휘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였지만 결국 시위 후 체포된다. 유익수는 이 해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윤병소는 5월 27일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된다. 홍순칠은 5월 27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병권은 5월 27일 징역 6월을, 윤동욱은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동년 7월 31일 태 90도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는 윤병소에게, 1983년에는 유익수에게, 1992년에는 홍순칠에게, 1996년에는 윤동욱에게, 2006년에는 김병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한 1990년에는 유익수와 윤병소에게 유익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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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군청 3.1운동 만세시위지
안성군청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0일 안성군 주민 1,000여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9일부터 안성 읍내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군청 앞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3월 30일 오후 7시부터 100여 명의 안성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시작하자, 점차 시위대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안성장터를 시작으로 안성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른 후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면사무소의 유리창을 파괴하였으며, 군청으로 가서 군수에게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3월 31일에도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행진하며 격렬하게 만세를 부르다가일본 경찰의 진압으로 해산되었다. 권만동(1898~1924)는 1919년 3월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3월 11일부터 시작된 안성군 읍내면의 시위는 3월 30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30일 읍내면 동리, 서리, 장기리에서 모여든 500~600명의 시위대는 저녁 8시경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였다. 다음날 3월 31일 3,000명의 시위 군중이 읍내에 모여서 군청과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등불 행진을 하였다. 읍내면 서리에 살던 권만동도 읍내면의 각 마을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2일 징역 6월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와 상고를 했지만, 모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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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초등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3·1 만세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지역 곳곳에서 만세 항쟁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구 안성군의 중심지이자 안성 장(場)이 열리는 안성읍내부터 구 양성군 지역인 양성면과 원곡면, 구 죽산군 지역인 일죽면, 이죽면, 삼죽면 등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안성읍내에선 1919년 3월 11일 안성공립보통학교(현 안성초등학교)에서 시위 움직임이 있었다. 이날 밤부터 안성 장(場)의 상인 수십 명은 만세를 불렀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안성읍내에서 같은 해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연속해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생존권을 위협받았던 상인은 물론 기생까지 나서며 일본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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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 공훈기념비
류만수(유만수)(1921 - 1975)는 경기 안성(安城) 금광면 사람으로,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동년 5월 일본 가와사키(川崎)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 취업 중인 한국인 노무자들과 참여한 민족차별 반대 농성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같은 회사에서 강제수용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여 일본 내의 노무자 단체에서 활동하며 일본으로 온 강제 징용자들의 구출 활동을 한 후 귀국하여, 1945년 5월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1945년 7월 20일 부민관(府民館)에 동지 3인과 다이너마이트 폭탄 2개를 만들어 몰래 대회장에 들어가 연단과 복도에 장치하여 폭발시킨 부민관 투탄 의거의 주역이었다. 애국지사 류만수 선생 공훈기념비는 애국정신과 독립 유공의 유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대한민국 광복회와 율곡문화원, 유한림문화원, 진주 유씨 문정공파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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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진 묘
최항진(1881 - 1919)은 경기도 안성(安城)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안성군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 구장으로 있으면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시위 군중 1,0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등불과 횃불을 들고 양성읍(陽城邑)을 향하여 행진하던 중 양성읍의 시위군중 1,000여 명과 합세하여, 총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시위행진을 벌였다.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활동하다가 부상을 당했으며, 1919년 4월 30일 안성경찰서장이 불을 지른 시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총칼로 주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현장에서 일경에 의해 타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을 인정하여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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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규 집
정문규(1915 - 1970)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으로,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중앙대학 동창인 최승우(崔昇宇)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중경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정문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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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규 공적비
정문규(1915 - 1970)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으로,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중앙대학 동창인 최승우(崔昇宇)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중경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정문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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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항쟁지비(양성면)
전국 3대 항쟁지로 손꼽히는 양성의 3․1 독립운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3.1 독립항쟁이다. 3월 11일 오전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교정에서 부른 독립 만세가 기폭제가 되어 4월 1일 밤 양성면과 원곡면민 약 2천여 명이 동항리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를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을 축출하였다. 이날의 항쟁으로 361명이 검거되고 127명이 옥고를 치렀다. 그중에서 24명이 순국하였고, 일경의 주모자 색출 과정에서 9채의 가옥이 불에 타고 40명이 태장 60~90대를 맞는 등 막대한 피해와 고난을 겪었다. 양성의 3.1 독립운동은 보통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각 마을에 퍼졌고, 또한 원곡면민과 동맹한 지역 연합적 성격을 띤 항일 독립투쟁으로 이를 기념하여 1997년 6월 6일에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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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독립운동 역사마을(양성주재소 만세 이후 터)
안성 3.1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주요 시위가 있었던 장소(양성주재소- 만세 이후 터)에 세워진 기념 사적이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이 1,000여 명의 원곡면민들을 주동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을 선두에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들은 양성면에 있는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고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귀가하던 1,000여 명의 양성면민들이 합류됐고, 이로써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양성주재소로 몰려가 일본인 순사부장을 불러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주재소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기물을 파괴, 방화한 뒤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또한, 인근 주재소와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또, 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귀향한 원곡면민들은 다시 원곡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 때 잡혀 옥고를 치른 사람만도 126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본래 현재 양성중학교 인근 도로변(양성면 동항리 413-7)에 있던 양성주재소는 만세 군중이 모두 불태워버려 사라지고, 일제는 보다 주민의 감시와 통제가 쉬운 위치로 옮겨 새로운 주재소를 지었다. 이 장소는 일제에 의해 만세운동 이후 새로 지어진 양성주재소의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