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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 집 터
권희(權憘, 1900-1955)는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장상리 안두일(지금의 시흥시 장현동)에서 대대로 세거한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종손으로 태어났으며, 1919년 4월 7일 군자면 구 장터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일제로부터 피체(被逮)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권희의 집에서 친구인 장곡리 장수산(이명 장순한), 이종영, 이종진, 이종형, 이응수와 모여 서울에서 온 손님을 통해 들은 만세운동 이야기를 하며 만세운동을 모의하였고, 4월 6일 권희가 대표로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내일 7일에 이 마을 구 장터(지금의 서안산 나들목 부근)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려고 한다. 각 주민은 구한국(舊韓國) 국기 1기를 휴대하여 모이라.”는 ‘비밀통고(秘密通告)’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동민들이 돌려 보도록 하며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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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 구 묘
권희(1900-1955)는 1919년 4월 6일 시흥군 군자면(君子面) 장현리(長峴里) 자신의 집에서 '일제의 학정에 대해 항거하기 위하여 4월 7일 군자면(君子面) 구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니 참가하라'는 비밀통고서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인근 동민들이 돌려보도록 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이에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묘소는 장현동 안동권씨 세장지(世葬之)에 있다가 시화지구 외곽 도로 토취장(土取場)에 편입되어 1993년 장현동 산72번지로 이장하였고, 2016년 6월 1일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구 묘비만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권희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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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기념비
독립지사 윤동욱(1891-1968)은 산현동 출신으로 1919년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1천여 명의 주민들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수암면 면사무소 앞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같은 해 7월에 형이 확정되어 태형 70대에 처해졌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시흥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조국 독립을 위한 숭고한 희생과 정신을 되살리고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계승하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추진 노력으로 2019년 3월 30일 독립지사 윤동욱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시흥시 산현공원 후문에 위치하고 있다. 윤동욱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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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구 묘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로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철종 10년(1859)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중추원 좌의장 등을 역임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무효화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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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복 기념비
김천복(1897 ~ 1968)은 1919년 4월 4일, 죽률리(죽율리) 주민 수십 명을 모아 당시 군자면 거모리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현 군자초등학교ㆍ파출소 주변) 앞에서 펼쳐졌던 ‘군자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본 경찰에 맞서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이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고, 동년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정신과 지역 독립지사의 업적을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여론과 추진 노력으로 시흥시 죽율로 생금어린이공원에 2018년 7월 17일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국가에서는 김천복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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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규 집
김윤규(1894 ~ 1962)는 1894년 12월 16일 경기도 수원시 음덕면 신남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31일에 대부면 동리에 사는 노병상, 홍원표 등과 함께 영전리 사격장에서 만나 독립 만세 시위 결행을 약속하였다. 같은 날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것을 들고 4월 1일 새벽에 대부면 주민들과 함께 권도일의 집 앞에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는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집터는 김윤규가 노병상, 홍원표와 함께 당시 부천군 대부면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에 활용할 태극기를 제작했던 곳이다. 집은 멸실되고 터만 남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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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기념비(대부동, 대부면)
안산 단원 대부면의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 등 3인은 1919년 3월 13일 대부면 영전리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이날 밤 11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베와 무명)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4일 오전 3시경 집 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곳 주민들이 합세하여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대부면사무소 앞에서도 시위하였다. 1982년 4월 1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옛 대부면사무소에 3.1독립만세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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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동(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대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부천군 대부면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대부면 영전리에서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 등이 만나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이날 밤 오후 11시경 대부면 동리의 김윤규 집에 모여 포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전 3시경 이들은 주민과 같이 지역 주막을 운영하던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윤규(1894 ~ 1962), 노병상(1891~1982), 홍원표(1875~1962)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부천군 대부면에서 이들은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김윤규 집에 모여 천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집합한 시위군중 수십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했으나 일경에 붙잡히게 된다. 이해 5월 8일 이들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는 노병상과 홍원표에게, 1992년에는 김윤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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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칠 공적비
홍순칠(1877 ~ 1932)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秀岩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는 등 준비를 갖춘 후, 3월 30일 비입동(碑立洞)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이게 되자 만세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普通學校)와 공자묘(孔子廟)를 돌며 독립만세 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안산지역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고 홍순칠의 유업을 기리고 추모하는 뜻으로 그의 생가 근처인 와동공원에 안산지역에서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3월 30일을 기념하여 2005년 3월 30일에 공적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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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만세시위지 와리 집결지
3.1운동 만세시위지 와리 집결지는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와리 주민들이 집결했던 곳이다. 수암면 와리 대지주 홍순칠은 1919년 3월 29일 이장들을 통해 수암면 내 18개 리에 통문을 돌려 주민들에게 다음날 수암리 비석거리에 모이게 했다. 이에 따라 3월 30일 와리 주민들이 수암리로 향하기 위해 와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홍순칠은 4km떨어진 비석거리까지 이들을 인솔하였다. 이렇게 비석거리에 모인 2,000명의 시위군중은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홍순칠(1877 ~ 1932)은 경기도 시흥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였다. 3월 30일 비입동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이게 되자 만세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와 공자묘를 돌며 독립만세 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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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어록비(샘골교회)
최용신 (1909~1935) 선생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YWCA 교사로 이곳 샘골 (천곡.泉谷)에 파견되어 마을사람들과 YWCA의 지원으로 1933년 1월 천곡학원 건물을 신축하고, 문맹퇴치와 농업기술 및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35년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중첩증으로 2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 현 일동 818 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薰)의 소설 「상록수(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2004년 10월 7일 최용신의 제자인 홍석필이 1억 5천만 원을 기탁함으로써 건립 사업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어, 천곡(샘골)강습소가 있던 그 자리에 2007년 11월 20일 최용신 기념관을 건립 및 개관하였다. 가까이에는 최용신의 묘와 함께 추모비를 비롯하여 농촌계몽 활동을 했던 교회인 샘골교회, 심훈문학기념비, 최용신의 유훈비와 기념비, 샘골강습소 주춧돌 15기 및 향나무 5그루 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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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묘
최용신 (1909~1935) 선생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YWCA 교사로 이곳 샘골 (천곡.泉谷)에 파견되어 마을사람들과 YWCA의 지원으로 1933년 1월 천곡학원 건물을 신축하고, 문맹퇴치와 농업기술 및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35년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중첩증으로 2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 현 일동 818 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薰)의 소설 「상록수(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큰 귀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