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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항일의병기념탑
성남항일의병기념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성남 출신의 남상목, 윤치장, 이명하 의병장을 비롯하여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투쟁한 성남지역의 무명 의병의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성남시에서 낙생대공원 초입 429㎡ 부지에 건립하였다. 높이 8.6m의 성남항일의병기념탑 옆에는 의병들이 깃발을 들어 항쟁하는 모습의 조형물과 성남 지역에서 벌어진 항일 의병들의 활동상을 기록한 표지석, 추모 제단 등을 설치했으며, 두 손바닥을 위로 마주 벌려 하늘을 떠받치는 형상은 항일 정신과 민족 얼을 우러러 받듦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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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3.1만세운동 기념탑
한백봉, 한순회, 남태희 선생의 주도하에 주민 3,000여 명이 천지를 진동할 만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분당구 율동에, 역사적인 만세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6년 3월 1일 성남 3.1만세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성남시 율동생태학습원 인근 성남3.1운동기념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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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봉 집 터
독립운동가 한백봉(1881-1950)는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광주군 돌마면 율리(突馬面 栗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파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여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동리 주민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8∼29일의 양일에 걸쳐 돌마면의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행진을 계속하였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격렬하고 끈기있게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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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회 묘
한순회(1885-1961)는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주군 천도교구장(天道敎區長)이던 그는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될 때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지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장차의 활동 자금으로 쓰기 위한 특별희사금 모집에 나섰는데, 이 사실이 일경에게 포착되어 1938년 3월 4일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붙잡혔고, 동년 5월 12일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1993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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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봉 묘
한백봉(1881-1950)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광주군 돌마면 율리(突馬面 栗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3월 28일과 29일 양일에 걸쳐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행진을 계속하였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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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낙생면사무소는 1919년 3월 27일 광주군 낙생면과 돌마면 면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7일 새벽부터 29일까지 사흘간 돌마면과 낙생면 면민들이 연합하여 만세시위을 전개하였다. 돌마면 군중들은 거사 당일인 27일 오전 10시경, 분당리 장터에 모여서 한백봉, 한순희 등의 주도하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게 외치며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하였다. 면내의 여러 곳을 순회하다가 오후에는 낙생면 판교리에 진출하여 낙생면 면민들과 합세하였다. 낙생면 면민들도 돌마면 시위군중들과 연합하여 만세시위을 전개하였다. 시위를 선도한 남태희는 돌마면 시위를 주도한 한백봉, 한순희 등의 권유를 받고 낙생면 면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그 결과 돌마면 군중들은 낙생면 면민들과 합세하여 면소재지인 판교리에 집결하였고, 인근 백현리·운중리·궁내리 주민들까지 시위에 합세하게 되면서 그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판교리는 면소재지이자, 7명의 헌병이 소속된 헌병주재소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시위 군중들의 숫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과격한 양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탓인지 헌병들과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일 저녁 무렵까지 시위대는 만세운동을 계속하다가 해산하였다. 한백봉(1881-1950)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광주군 돌마면 율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파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여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동리 주민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8∼29일의 양일에 걸쳐 돌마면의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행진을 계속하였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격렬하고 끈기있게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순회(1885-1961)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광주군 천도교구장이던 그는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될 때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지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장차의 활동 자금으로 쓰기 위한 특별희사금 모집에 나섰는데, 이 사실이 일경에게 포착되어 1938년 3월 4일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붙잡혔고, 동년 5월 12일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1993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남태희(1867~1926)는 낙생면과 이웃한 면들과 연합해 낙생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는 등 3.1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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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장 묘
윤치장(1876-1972)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정미 군대해산을 당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국권을 바로 잡고자 1907년 음력 10월경 동지 70여 명을 규합하여 거병하였으며, 대체로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0월 11일 양주(楊州)에서 체포되었는데, 광주군 묵동(墨洞)에서 주둔한 일본 기병대와의 교전, 군자금 모금 및 탄약 구입 등의 사실로 인해 1909년 3월 23일 경성 공소원으로부터 징역 15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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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운동지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운동지는 1920년대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인 학생들이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3일 밤,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인 학생 36명이 기숙사를 빠져나와 서울의 시위운동에 합세하였다. 이러한 항일의식이 계승되어 이후 1920년대는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5월 3일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 전부가 조선인 차별 금지를 포함하여 학교에 7가지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동맹휴교를 단행하였다. 순종의 인산을 당한 1926년에 수원농림학생들은 자진휴학을 결정하고 6월 10일 상경하여 순종의 인산무전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1926년 6월 21일 학생 20명이 일제의 처사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단행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1926년 4월 수원고농 농학과에 입학한 김찬도, 우종휘, 고재천, 권영선, 김봉일, 김익수 등과 임학과의 백세기, 육동백 등은 1926년 6·10만세사건, 동맹휴교 사건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들은 수양단, 건아단, 계림흥농사, 조선농민사 등의 비밀결사운동을 진행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수원고농은 항일학생운동의 진원지이자 핵심적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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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민단 결성지(서호)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는 독립운동 결사체인 구국민단을 조직하고자 비밀리에 준비모임을 하던 곳이다. 구국민단(救國民團)은 1920년 수원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결사단체로 1919년 9월 수원군 동면 남창리에 거주하던 학생 박선태(朴善泰)는 같은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에 거주하던 학생 이종상(李種祥)·이득수(李得壽)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펴기로 하고, 1920년 7월경까지 수원일대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과 『대한민보』 등 다수를 반포하였다. 한편, 1920년 6월 삼일여학교 여교사 차인재(1895-1971)의 소개로 졸업생 임순남, 최문순(1903-미상) 등이 활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20일에 임순남(林順南)·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 여학생을 동지로 포섭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박선태는 단장, 이득수는 부단장이 되어, 조선독립국가의 실현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입옥 또는 순국한 지사의 가족 및 유족의 구조를 목표로 삼아 활동하였다. 이들은 수원의 서호(西湖) 또는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며 목표달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특히 여학생들은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실형 또는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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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면수 구 묘
임면수(1874-1930)는 삼일학교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수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으며, 1912년 2월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데 경기도 대표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개척사업과 신흥학교 설립에 기여하는 한편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2월 길림(吉林)에서 활동중 길림영사관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으나 평생을 고생하다가 병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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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상업강습소 터
1908년 4월 15일 홍건섭, 홍민섭, 김흥선, 양성관, 신준희, 박재윤 등이 중심이 되어 수원군 남부면 남수동에서 수원상업회의소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9년 2월 2일에 수원상업회의소 부속사업으로 상업에 관한 지식, 기능의 강습을 목적으로 수원상업강습소를 부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강습소는 오늘날 수원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된다. 일반 민중의 교육을 위하여 야학으로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힘으로 경영하는 민족교육기관으로 경제적 자활을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15일 조선상업회의소령이 공포되면서 이 법령에 의한 새로운 상업회의소 설립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여 1916년 4월 수원상업회의소가 폐쇄되고 이에 따라 상업강습소도 경영난으로 폐교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에 몇사람 유지의 열성으로 그 해 4월 27일 화성학원이라 개칭하고 주학으로 보통과, 중등과, 고등과를 두고, 야학에는 초등과, 전수과를 두게 되었다. 이규재, 최상훈, 정준화, 윤용희 등이 교편을 잡았다. 1926년 2월 20일 홍사훈이 인수하여 같은 해 5월에 화성학원이라는 교명으로 당국의 인가를 얻었으나. 당초 설립목적과는 달리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화성학원(수원상업강습소)은 애국계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수원의 민족교육기관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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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독립 기념탑, 대한민국 독립운동 기념비
처음 삼일운동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던 현재 삼일 위치에는 본래 일제가 세운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일본 순사의 순직비가 세워져 있었다. 1919년 3월 28일, 사강시장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을 진압하던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애국지사 홍면옥에게 총상을 입히고 군중을 피해 도망치다 붙잡혀 처단 당했다. 노구치가 처단 당했던 장소가 지금의 사강시장 옆 수협건물 앞, 옛 송산면사무소(=지금의 사강 4리 마을회관), 송산면사무소 뒷산(=송산초등학교) 등이다. 한편 일제는 노구치 순사부장의 순직을 기리는 비를 지금의 방화수류정 인근 삼일상고 부근에 세웠는데 광복 후 1945년 8월 15일에 이 순직비를 부수어 없애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다. 1969년에 4월 12일 삼일동지회가 팔달산에 삼일독립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전에 중포산에 세워졌던 기념비를 함께 같은 자리에 이전하기로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조성되었다.